우리마을탐방[221] 풍기읍 삼가리 당골·정안동

당골, 해방 전(1943년) 평안남도 정감록파 정착 
정안동, 천고의 비경 간직한 소백의 마지막 보물

 

당골 전경
정안동 단풍

풍기 당골·정안동 가는 길
풍기읍 삼가리에 있는 당골과 정안동은 소백산 비로봉 남쪽, 연화봉 동쪽에 있다. 풍기읍에서 동양대-금계리-영전고개-삼가지(三街池)를 지나면 삼가동이다. 비로사로 오르는 삼가(三街)에서 좌측 방향으로 200m쯤 가면 당곡교(堂谷橋)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당골이고 우측으로 접어들면 정안동(靜安洞)이다. 지난 추석 무렵 송이가 한창일 때부터 단풍이 곱게 물든 지난 달 25일까지 당골과 정안동에 여러 번 들러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담아 왔다.      

역사 속의 삼가리 당골·정안동
풍기는 신라 때 기목진(基木鎭)이라 불렀고, 고려 때는 기주(基州), 조선 태종 13년(1413) 기천현(基川縣)이 됐다가 1450년 풍기군(豊基郡)으로 승격됐다. 조선 중렵(1600년경)군(郡)의행정구역을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삼가리(당골·정안동) 지역은 풍기군 서부면(西部面) 욱금리(郁錦里)에 속했다. 1896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 풍기군 서부면 상삼가동(上三街洞)이 됐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풍기면 삼가리에 속했다. 그 후 1973년 풍기읍 삼가리, 1980년 영풍군 풍기읍 삼가리, 1995년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안동 계곡
수령 700년 당골소나무

지명유래
당골은 삼가동에서 본마 다음으로 큰 마을이다. 마을 초입에 700년 수령 소나무는 수문장이 되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여기서 500m 가량 올라가면 유난히도 단풍이 고운 숲 속에 단군여신(檀君女神)을 모시는 성황당(城隍堂)있다. 유서 깊은 당집이 있어 ‘당골’이라 부른다. 골짜기 막장으로 계속 올라가면 연화봉 정상에 이르고, 서쪽 골짜기로 가면 희방사목넘이 고개가 나온다.

또 마을 중간지점에서 남쪽방향으로 한참 가다가 곰넘이재를 넘으면 유석사·창락2리가 나온다. 정안동(靜安洞)은 당곡교에서 우측방향 계곡이다. 골이 깊고 수목이 무성하여 대낮에도 어두컴컴하다.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소백산 비로봉이다. 예전에 풍기사람들이 가장 깊은 골짜기 안에 있다하여 ‘저-안골’, ‘저-안동네’라고 부르다가 어느 때 부터인가 ‘지안동’이 됐다고 한다. 또 아주옛날 정안사(靜安寺)라는 절이 있어 ‘정안동(靜安洞)’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지금은 정안동으로 굳어졌다.

정안동 소백산 기도원

정감록 비결처 당골·정안동 
이곳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궁금하다. 현재 여기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해방 전 1943년 정감록 비결을 믿고 풍기땅을 찾아왔던 정감록파 2세들이다. 조선시대 때 예언서인 정감록은 전쟁 또는 재앙으로 온 세상이 멸망해도 인간의 씨를 구할 수 있는 열 곳을 정해 ‘십승지’라 했다. 대동아전쟁이 한창일 무렵(1943년) 평안도, 황해도 사람들 사이에는 ‘풍기로 가야 산다’는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자 너도나도 짐을 싸 풍기로 향했다고 한다.

조종호(67) 삼가리장은 “당골과 정안동은 정감록 1승지 중에서도 가장 깊은 산속에 숨어있는 비장처(秘藏處)”라며 “당골은 삼가리에서 둘째로 큰 마을이고, 정안동 계곡 안쪽에는 정감록파 기독교인들이 1970년대 설립한 기도원이 있다”고 말했다.

천고의 비경(비境) 정안동

양승백 전 이장

향토사학자 송지향 선생은 향토지에 “정안동 계곡은 해방직후까지 화전민과 숯을 굽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몇 집 살았다가 철거하고, 그 어귀에만 너댓집이 살고 있다. 이 계곡은 초암계곡과 함께 소백산 제1경으로 하얗게 쏟아져 부서지는 성낸 여울은 문자 그대로 청류격단(淸流激湍)”이라 썼다. 향토지는 “잡목숲에 얼크러진 머루·다래넝쿨 밑으로 숨어 흐르는 계곡물은 작은 폭포와 소를 반복하고 있다”며 “번요(煩擾)한 세상 티끌이 넘어들지 못한 여기는 약초꾼이나 등반객의 발길도 미치지 않아 소백산에서는 이 계곡만이나마 천고(千古)의 비경을 그대로 지니게 됨이 못내 다행스럽기도 하다”고 했다.

정안동에서 토종벌을 치고 있는 양승백(60) 씨는 “선친께서 정감록 비결을 믿고 해방전(1943) 월남하여 이곳에 정착하셨다”며 “당시 정감록파 15가구 정도 여기서 살았는데 산전을 일구고 숯을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는 이야기를 선친께 들었다”고 말했다. 정감록파 2세 엄부전(70,동부4) 씨는 “1943년 정안동은 나무로 틀목(돼지우리모양)을 짜 벽을 만들고 새강(억새)으로 지붕을 덮은 초막집에 살았다”며 “논이 없으니 옥수수, 감자로 연명했다”고 말했다.

당골 서낭당

당골 서낭당
당골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찾지 못했다. 이 마을 김락준(62) 씨는 “정감록파가 정착한 1943년 이전에도 당골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며 “당골 서낭당은 단군여신을(檀君女神) 모신다. 예로부터 태백산은 남신을 모시고 소백산은 여신을 모시는데 당골서낭당을 비롯한 소백산 산간마을 대부분은 단군여신을 모신다. 서낭당 안에는 두 시녀와 호랑이를 거느린 단군여신상이 모셔져 있다”고 말했다.

고조부 때부터 당골에 살았다는 김유홍(67) 회장은 “제가 국민학교 2학년 때 증조부께서 94세로 돌아가셨으니 1870년경 당골에 입향하신 것으로 추정된다”며 “그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조부 때부터 여기 살았으니 여기 산지 150년쯤 됐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또 “매년 정월 보름날 자시(0시)에 서낭제를 올린다”면서 “예전에는 제관이 정해지면 도가와 샘 그리고 서낭당에 금줄을 치고 붉은 흙을 뿌려 엄숙하고 정갈하게 제수를 준비했다. 서낭제는 헌관이 잔을 드리고 축관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축문을 읽은 다음 집집마다 평안을 비는 소지를 올렸다”고 말했다.

송이꾼1
송이꾼2

송이마을(당골·정안동)

유영숙 할머니

기자가 당골에 간 것은 10월 1일 오전이었다. 송이꾼들은 먼동이 틀 무렵 송이 채취를 위해 집을 나선다. 5시간정도 작업을 하고 11시-13시 사이 집하장(集荷處)으로 돌아온다.
여성 송이꾼 홍화연(76) 씨는 “새벽 6시부터 작업에 들어가 12시까지 따고 마을로 돌아온다”며 “늘 해 온 일이기 때문에 무섭거나 힘들지는 않다”고 말했다. 송이 따러 간 사람들이 대부분 돌아왔는데 어르신 한 분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모두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회원들이 따 온 송이는 상중하로 분류하여 1kg씩 달아 검은 비닐에 담는다. 송이를 사러 온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다 즉석에서 사 가지고 간다. 13시 30분경 이종현 어르신께서 곰넘이재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날 송이 집하장집 주인 유영숙(80)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며칠 뒤 기자를 만난 유 할머니는 “아들집에 갔다왔다”면서 “22살에 당골로 시집와 여태 여기서 살았다. 아들 대학시킬 때 풍기직물공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어 졸업시켰다. 당골이 좋아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득성 유필녀 부부
당골 사람들

당골·정안동 사람들

김현기 씨

기자가 당골에 처음 간 날 김득성(76)·유필녀 부부댁을 먼저 찾아갔다. 5년전(2013) ‘산마을 사람들’을 취재할 때 맷돌 사진도 찍고, 맷돌로 갈아 만든 콩국수도 먹었던 일들이 고맙고 감사해서다. 부인께 인사를 드리고, 김득성 씨는 막장 과수원 근처 송이채취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만났다.

이종현(85) 어르신은 “사람이 평소에 하던 일을 못하면 죽는다”면서 “송이를 채취하는 일은 어려서부터 늘 해오던 일이기에 잘 해 낼 수 있다”고 노익장을 과시했다. 정감록파 3세인 김현기(56) 씨는 “우리마을은 봄 산나물 가을 송이가 주 소득원”이라며 “송이계는 마을공동체로 운영하고 있으며, 개별로 장뇌삼을 재배하는 사람, 토종벌을 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김효수(63) 씨는 “송이는 해발 600-1000m에서 나온다”며 “송이를 많이 채취하여 공동체에 큰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삼봉 카라반 갬핑장을 운영하고 있는 정병화(63) 씨는 “풍기에서 직물공장을 운영하다 5년 전 당골에 왔다”면서 “당골은 정안동과 함께 천고의 비경을 간직한 소백의 보물”이라고 말했다. 

박계월(77) 씨는 “강원 화천에서 태어난지 1주일만에 당골로 왔으니 당골에서 77년 살았다”며 “예전에는 산전을 일구고 산나물을 뜯어다 팔아 먹고 살았다. 쌀밥 먹기가 어려웠으니 좁쌀, 옥수수, 감자가 주식이었다”고 말했다.

조종호 이장
김유홍 산림회장
이종현 어르신
김득성 씨
박계월 씨
홍화연 씨
정병화 씨
김효수 씨
김락준 씨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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