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11월 3일은 『학생의 날』이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 도착한 광주발 통학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중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중학) 여학생들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했다. 이를 항의하는 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 간의 한판 난투극이 벌어졌다. 경찰은 일본인 학생 편을 들어 조선인 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렇잖아도 식민지 물자 수탈과 조선인 차별에 시달리던 학생들의 참았던 분노가 한꺼번에 표출되면서 11월 3일 대규모 항일시위가 일어났다. 이날은 일본 메이지 국왕의 생일인 명치절(明治節)이자 조선인에게는 음력 10월 3일 즉 개천절(開天節)이었다. 조선 학생들은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고 침묵으로 항의했으며, 의사를 분명하게 하고자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후 ‘광주학생운동’은 전국의 학교 및 사회 각계의 대중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날을 기념하는 것이 『학생의 날』이다.
올해로 89주년을 맞는 『학생의 날』 기념식은 올해부터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성대하게 치러진다고 한다.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3대 항일운동으로 평가받는 <광주학생운동>을 정부기념식으로 격상시킨다는 뜻이다. 지금까지는 사실상 광주시교육청 주관의 지역행사로 치러져 왔다.
우리지방에서는 <광주학생운동> 보다 근 10년이나 앞선 1920년 6월 19일 영주공립보통학교에서 ‘영주청년회’라는 조직이 결성되었다. 당장에 참가자가 수백 명에 이르렀고, 거금 2,000여 원(서울 기와집 2채 값)의 모금액이 걷히는 등 창립 첫날부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영주청년회’는 「덕성함양·학문증진·체육발전·풍속교정」에 목적을 둔 친목단체인 양 출발했지만, 창립 이후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하고 강습회를 열어 야학운동을 펼치는 등 사실상 항일운동을 목표로 움직였다. 또한 그들은 단주동맹(斷酒同盟)을 조직하고 그 취지서를 인쇄·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25년 치안유지법 공포 이후, 경찰 단속이 심해지면서 청년회 활동은 순조롭지 못했다. 결국 7년여 활동을 접고 1927년 11월 24일 ‘영주청년동맹’에게 역할을 인계해준 뒤 ‘영주청년회’는 그렇게 임무를 마쳤다. 이후 창립된 ‘영주청년동맹’은 일제에 대항하는 활발한 활동을 펼쳤는데, <영주격문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1929년 말부터 이듬해 초에 걸쳐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자 ‘영주청년동맹’은 사건발생을 선전하고 일제에 맞서 강력히 투쟁할 것을 권유하는 유인물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당시, 비료로 써야할 대두박(大豆粕)찌꺼기와 술막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게 하고, 어린 학생에게까지도 근로봉사라는 미명아래 온갖 폐품수집, 심지어 개똥, 쇠똥까지 주워오게 하면서, 학생들 상호간 소위 불온신민(不穩臣民)을 색출하라 하고, 매일 황국신민칙어, 황국신민서사를 외워야 하는 고통을 받고 있던 초등학생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급기야 1944년 9월 순흥공립심상소학교(현 순흥초등학교, 이하 순흥소학교)의 학생들이 <동맹휴학>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회 지도층이 중심이 되는 독립군, 의병항거는 간혹 있었다지만 초등학생들의 항일운동은 처음이었다. 물론 그때의 소학교 학생들은 지금의 초등학교 아이들보다는 나이가 훨씬 많았다지만, 어떻든 초등 교육과정에 있는 소학교 학생들이 항거했다는 사건은 필시 주목되는 일임이 분명했다. 적체된 민족감정이 어린 학생들에게도 저주로 맺혀 일본인 교장과 일본인 교사를 축출하려는 순흥소학교 육학년생 전원의 일치단결된 <동맹휴학>사건에 대해 처음에는 일본인 교장이 강경 대응으로 맞섰다. 주동자인 급장을 퇴교 조치하고, 적극 가담자들의 부모들을 불러 협박하였다. 그렇지만 사태가 오히려 번져나갈 기미를 보이자 경찰이 개입하였다. 결국 신속히 무마시켜 사건 확산을 막아야할 일경의 의해 외부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학생들의 기개와 항일정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순흥소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 사건은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광주제일고보 학생사건은 그 동기가 통학열차 안에서 조선인 학생 대 일본인 학생간의 싸움이 발단이 되어 민족감정으로 비화된데 비해, 순흥소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은 애초부터 항일운동에 목표를 둔 사건이었으므로 차별된다고 할 수 있다. 순흥소학교 학생들은 “일본인 교장과 일본인 교사에게서는 교육을 받을 수 없다"며 6학년 전체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거행하였고, 그로부터 얼마 뒤에는 4학년 김락순(金洛淳) 학생이 단독으로 교장에게 조목조목 따지며 "일본은 곧 패망할 것이니 앞으로는 학생들과 조선인들을 인간적인 양심으로 교육하여 후환이 없도록 하십시오!"라고 당돌하게 항의하여 처음에는 혼쭐이 났으나 결국은 교장으로부터 눈물의 참회와 항복을 받아내기까지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