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서각(시인·문학박사)

어린 시절 아버지가 보시던 동아일보로 흙벽에 도배를 했다. 허연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입은 노인의 사진이 우리 식구가 밥 먹는 방의 벽에 붙어 있었다. 굵은 제목으로 쓰인 ‘정부에 들이대는 말’이라는 글자가 늘 내 눈에 들어왔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제목만은 아직 기억에 남아있다. 짐작하건대 이승만의 독재를 비판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한 노인이 이승만 정권에 들이댄 것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분이 우리가 겨레의 스승으로 섬기는 한석헌 선생이시다.

  함석헌 선생은 ‘씨ㅇ`ㄹ의 소리’라는 잡지를 발행하셨다. 그분의 사상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늘 말씀하시는 ‘씨ㅇ`ㄹ’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며칠 전 영주의 시민단체인 ‘민본실천 시민연합(회장 김영모)’이 주관하는 ‘정도전의 민본사상과 함석헌의 씨ㅇ`ㄹ사상’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이 세미나를 통해 함석헌 선생의 씨ㅇ`ㄹ에 대해 조금은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선생은 국민이나 민중이라는 말 대신에 ‘씨ㅇ`ㄹ’이라는 말을 쓰셨다. 씨ㅇ`ㄹ은 민중이나 국민과는 조금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씨는 종자를 말한다. 그러니까 생명의 근원이다. ‘ㅇ`ㄹ’의 ‘o’은 하늘을 ‘ㆍ’는 사람을 ‘ㄹ’은 운동과 생성을 뜻한다. 온전한 씨ㅇ`ㄹ은 생명을 품고 있어야 하며 봄이 오면 싹을 틔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이 센 통치자가 이리 가라면 가고 저리 가라면 가는 사람은 씨ㅇ`ㄹ의 본분을 알지 못하는 자라 할 수 있다. 선생이 ‘씨ㅇ`ㄹ의 소리’를 줄기차게 발행한 것도 씨ㅇ`ㄹ을 씨ㅇ`ㄹ답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가령 조선왕조가 망하고 일본제국주의가 침략했을 때 우리는 일본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일본에 저항해 보아야 이길 수 없음이 불을 보는 듯했다. 많은 사람들이 체념하거나 친일파로 돌아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의병활동이나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계신다. 우당 이회영이나 석주 이상용 같은 이는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에 거서 무관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나라가 완전히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독립군이 되거나 독립운동을 했다. 이육사의 시 ‘절정’이 있다. 일제 식민지 침탈로 나라를 빼앗겨 어디에도 발붙일 땅이 없는 상황을 절정이라 했다. 시의 마지막 연은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고 노래했다. 아무리 일제식민통치가 겨울의 추위처럼 견딜 수 없어도 시인의 마음은 광복을 뜻하는 무지개를 본다. 강철로 된 무지개는 사라지자 않는다. 강약은 부동이지만 광복의 의지는 꺾을 수 없다는 씨ㅇ`ㄹ 정신이 나타난 일제강점기 최고의 저항시다.

  이러한 씨ㅇ`ㄹ사상이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이어오게 한 힘이었다. 지금 우리민족은 분단 극복이라는 역사의 고비에 서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어떤 나라도 한반도의 평화를 원하는 나라는 없다. 강대국들은 우리를 좋은 먹잇감으로 여기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무기는 씨ㅇ`ㄹ의 힘이다. 아무리 강한 자 앞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것이 함석헌 선생의 씨ㅇ`ㄹ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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