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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乃城川)과 매화(梅花)가 만난 절승(絶勝) ‘내매(乃梅)’우리마을탐방[220] 이산면 신천1리 ‘내매’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8.10.25 10:39
  • 호수 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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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 나경공 후손 400년 세거지 내매(나장골)
100년 전 신문화의 발상지 내매교회와 내명학교

나장골 전경
달내삼거리

신천1리 내매 가는 길
내매는 이산면의 동쪽 내성천변에 형성된 진주강씨 집성촌이다. 이산면 신천1리 나장골, 큰골, 아랫골, 밀골과 평은면 천본2리 내매(음지마)를 통틀어 내매라고 한다. 내매 사람들은 영주댐 수몰로 대부분 마을을 떠났으나 일부만 산 중턱으로 이전하여 새로운 마을이 형성했다.

지난 15일 내매마을에 갔다. 이날 달내삼거리 인근에 있는 박계표 노인회장 댁에서 이유선 이장, 원춘호 부녀회장, 강신혁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을 만나 내매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신천1리
내매마을이 속한 신천1리 지역은 조선 태종14년(1414년)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옛영주) 남면에 속했다. 조선 중기(1600년) 군(郡)의 행정구역을 리방(里坊)으로 정비할 때 영천군 어화곡면(於火谷面) 굴천방(掘川坊)이라 부르다가 1700년경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개편하면서 어화곡면 굴천리가 됐다. 조선 후기 1896년(고종33) 경상북도 영천군 어화면(於火面) 굴천동(掘川洞)으로 개칭됐다가 1914년 일제 때 영주군 이산면 신천1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유선(50) 이장은 “신천1리는 나장골, 큰골, 아랫골, 밀골, 달내 등 여러 마을로 구성된 큰마을 이었으나 영주댐(2009-2016) 수몰로 대부분 고향을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높은 지대로 이전하여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게 됐다”며 “지금은 나장골에 7집, 달내에 3집이 있고, 띄엄띄엄 23호가 살고 있다. 또 강 건너 내매에도 5집이 산다”고 말했다.

내성천과 매화낙지의 절승

지명유래
진주강씨 영주 입향조 나경공(諱 貞,1535-1616) 묘비에 ‘내매’의 지명유래가 잘 나타나 있다. 「나경공(羅慶公)은 원래 경기도 장단군 장서면(長西面) 대위리(大威里)에 살았다. 부 윤수(允壽)·모 의성김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배움을 좋아해 서당에 나아가 사서삼경을 숙독했다. 58세가 되던 해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 부인(평산신씨), 아들(順希), 며느리(순흥안씨)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죽령을 넘어 영남 땅에 이르러 처음 찾은 곳은 안동부 감천현이었다. 전쟁이 없고 평화가 깃든 땅을 찾아 헤매던 중 내성천(乃城川)이 흐르다 매화낙지(梅花洛池)를 만나 절승(絶勝)을 이룬 내매(乃梅) 땅에 정착했다」고 적었다.

내매란 내성천에서 내(乃)자를 따고 매화낙지에서 매(梅)자를 따 내매(乃梅)라 했다한다. 나경공이 처음 터 잡은 곳은 나장골이다. ‘나장골’은 입향조 나경공의 ‘나(羅)’자에 감출 장(藏)자를 써 나장골(羅藏谷)이라 불렀다. 나장골은 나경공이 난을 피해 몸을 감춘 곳이란 뜻이다. 박봉산에서 발원하여 용상골과 어실을 거쳐 흐르는 내(川)를 달천(達川) 또는 달내라 부른다. 달내의 달(達)과 내(川)가 합쳐져 달내가 됐다. 또 달천과 내성천이 합류한다하여 달내(達乃)라 부르기도 한다.

입향조 묘에서 출토된 유물

나경공의 후손들
나경(羅慶)은 입향조 강정(姜貞, 晉州姜氏 박사공파13세손)의 호다. 공은 내매 나장골에 정착하여 다래덤불을 헤치고 농토를 개간했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또 아들(順希,1566-1634)을 이산서원에 보내 학업에 열중하게 했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내매 입향 후 얼마를 지나 나경공의 장손 경룡(景龍)은 영주 뒤새(杜西,현 제일교회·영광중)로 나가고, 둘째 손자 격화(格化,1608-1678)는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내매(나장골)에 뿌리를 내렸다.

강창기 전 시의원

나경공의 후손 강창기(74,전 시의원) 씨는 “격화 할아버지의 후손들은 나장골을 중심으로 음지마, 양지마, 큰골, 아랫마 등지로 영역을 넓혀 ‘내매’라는 큰 집성촌을 형성하게 됐다”면서 “정(貞) 선조께서 내매에 입향하신지 올해로 426년이 됐다. 영주댐 수몰로 나경공 묘와 순희 선조의 묘를 이장할 때 유물(백자완외26점)이 출토되어 소수박물관에 기증했다”고 말했다.

옛 내매교회

경북북부 최초 교회 ‘내매교회’
내매교회 설립자 강재원(姜在元) 장로는 입향조 정(貞)의 8세손이다. 그는 1901년 대구에서 신학문(新學問)을 하고 있을 때 약령시(藥令市)에서 미국 선교사 베어드(W.M Baird)의 전도를 받아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대구 최초의 교회인 대구제일교회를 다니다가 1906년 고향 내매로 돌아왔다. 고향에 오자마자 마을 유병두 씨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내매교회의 시작이다. 이듬해 자신의 집에 십자가를 세우고 예배 처소를 만들어 주일 예배를 드리다가 1909년 초가 6간 교회를 지었다. 당시 초대 교인으로 강재원 외 강병주, 강병창, 강신유, 강신찬, 강석구, 강석복 등이 있었다. 나장골의 강신경(70) 씨는 “1913년 교회를 새로 지을 때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유교의 가르침 때문에 ‘ㄱ’자 방을 만들어 남녀가 서로 보이지 않게 앉아 예배를 드렸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며 “당시는 한복에 갓 쓴 사람이 대부분이었으니 그럴만도 하다”고 말했다.

복원된 내매교회와 내명학교

내매교회가 배출한 인물
내매교회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교회가 배출한 걸출(傑出)한 인물들이다. 목회자로는 영락교회를 설립하고 새문안교회에서 24년 간 목회 활동을 한 강신명(대한예수교장로회 48대 총회장) 목사을 비롯한 강병주·강인구·강신춘·강석진·강신창·강문구·강교구·강달구·강재구 목사 등 33명의 목회자를 배출했다. 또 마산 창신대학교 강병도 총장, 영광교육재단 강석일 장로, 강진구 삼성반도체 회장, 강신주 삼성전자 사장, 성유상사 강항구 사장, 성창합판 강병덕 사장도 내매교회가 배출한 인물이다.

지금도 고향 내매에 살고 있는 강신근(68) 씨는 “내매교회와 기독내명학교는 영주댐 수몰로 본래 자리에서 위쪽으로 올라와 남쪽 방향 500m 지점에 이설복원하여 지난해 10월 입당감사예배를 드렸다”면서 “흩어져 사는 내매사람들은 해마다 10월이면 ‘내매사람들 모임’을 갖는데 올해는 10월 27일(토) 11시에 모인다”고 말했다.

내매교회 부설 기독내명학교

윤재현 목사

내매교회를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은 인재 양성을 위해 사립 기독내명(內明)학교를 세웠다는 것이다. 당시 강병주(강신명 목사의 부친), 강석진 목사가 주축이 되어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4월 5일 기독내명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경북 북부지역 최초의 기독사립학교였고, 영주교육사에서도 순흥학교와 풍기학교에 이어 세 번째 학교였다. 사립기독내명학교(4년제)는 1946년 내명국민학교(6년제)로 승격 개교하여 85년 동안 졸업생 2,185명을 배출하고 1995.3.1. 폐교됐다. 내매교회 윤재현 담임목사는 “대한예수교 장로회는 내매교회 부설 기독내명학교(1910)를 한국기독교 사적 제11호로 지정(2013)했다”면서 “112년의 역사를 가진 내매교회와 내명학교의 역사성을 잘 보존하고, 내매사람들의 정신을 계승·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나장골 앞 유사조절지
옛 큰마 터
내매마을 사람들

신천1리 사람들
박계표(75)·강분화(74) 씨 부부가 사는 집 마당에는 대추, 고추가 널려 있고, 텃밭에는 콩, 배추, 무가 자라고 있다. 박 씨 부부는 “2014년 풍광이 아름다운 곳으로 귀촌했
다”며 “처음에는 조금 살다 가려고 했는데 마을 사람들과 정이 많이 들어 이제 평생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원춘호(61) 부녀회장은 “현재는 마을회관이 없고 띄엄띄엄 흩어져 살지만 마을행사나 중요한 일이 있으면 적극 참여하고 화합한다”면서 “정월보름 윷놀이 때나 어버이날 행사 때는 달래고개 어르신댁에 모여 행사를 치룬다”고 했다.

달래마을에 사는 강은구(62) 씨는 “어릴 적 내매에는 나장골에 28호, 큰마 24호, 아랫마·밀골에 26호, 강건너 내매에 20호 등 모두 100여호가 살았다”고 말했다. 나장골의 권효자(76,안동권) 씨는 “현 유사조절지 주변 강가에 논이 있었고, 산자락에는 집들이 한줄로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며 “모두 진주강씨만 사는 집성촌이었다”고 말했다.

임종순(72,예천임) 씨도 “내매마을은 1반 나장골, 2반 큰골, 3반 아랫골에 타성은 한집도 없고 강서방네만 살았다”면서 “마을에 길흉사가 있을 때는 모두 모여 합력했다”고 말했다. 강신혁(63) 새마을지도자는 “신천1리 농업은 고추, 수박을 중심으로 생강, 참깨, 땅콩 등 밭작물 중심 농업”이라고 말했다.

안순남 씨

달래마을 안순남(50) 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시어머니께서 마을의 내력을 잘 아신다”며 전화를 바꿔 줬다. 최향란(86) 할머니는 “내매에 살다가 수몰로 달래에 와서 새집을 짓고 산다”며 “우리 손녀가 참 이쁘다. 이산초교에 다니는데 농촌에 아이들이 없다. 우리 손녀뿐”이라고 말했다.

이유선 이장
박계표 노인회장
원춘호 부녀회장
강신혁 새마을지도자
권효자 씨
강분화 씨
임종순 씨
강신경 씨
강신근 씨
강은구 씨

이원식 시민기자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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