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석조반가상 출토지 표지석

경북대학교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보물 제997호 석조반가상은 현존하는 반가상(半跏像, 반가부좌의 자세를 취한 불상) 중 그 규모가 가장 큰 반가상으로 남은 하반신만으로도 높이가 1.6m나 된다. 상반신까지의 복원 추정 높이가 2.5m에 육박할 만큼 규모가 큰 것 반가상이다. 상반신을 잃은 불구의 몸으로도 선뜻 보물로 지정될 만큼 규모나 가치 면에서 최고의 수준으로 꼽히는 국가문화재라는 뜻이다.

불상이 원래 있었던 곳은 봉화 북지리 구산마을 안쪽이다. 1965년 신라오악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고, 이미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서는 ‘거북바위’라고 전설처럼 불려오던 바위였다고 한다. 금천사터로도 알려진 이곳에서 마을사람들이 ‘거북바위’ 라고 불러온 돌덩어리를 살펴보니 어렴풋한 조각 흔적이 있었고 이를 뒤집어보니 놀랍게도 반가상이었다고 한다.

하반신의 날씬한 허리, 실제 비례보다 과장되어 시각적으로 든든한 느낌을 주는 반가부좌의 무릎, 자연스러운 흐름을 잃지 않은 치맛자락, 두 발은 없어졌지만 발받침 연화의 정교함 등이 흡사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만난 듯한 느낌을 주었다고 한다.

현재 지림사에 안치되어 있는 북지리마애여래좌상(국보 제201호)과는 불과 1㎞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북지리마애여래좌상과의 연결을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그리고 이 불상(속칭 거북바위)이 가미됨으로써 이 지역 석조 미술의 더욱 높은 경지를 보여주게 되었다는 게 학계의 격찬이다. 북지리석조반가상은 비록 하반신만 남았지만 허리 이하의 높이만으로도 우리나라 반가상 중 최대 규모이며, 동양에서도 가장 큰 작품으로 생각된다.

이 반가상은 보살상이므로 본래 머리에는 보관을 썼으며 상반신은 나체로 표현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오른손은 결실되었고, 무릎에 놓았던 왼손의 5지(指)만을 남기고 있다. 두 다리 중 반가 형식을 취하여 왼쪽 무릎 위에 얹은 오른쪽 다리는 대좌 밖으로 1단 높이 솟은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 조각 솜씨는 특히 힘차며 세련된 표현을 보이고 있다. 하반신에서 둥근 대좌에 걸쳐 흘러내린 옷 주름 조각이 특히 깊게 파져 있다. 그리고 옷 주름도 매우 아름답다. 허리에는 요대가 있고 몸 좌우에 매달린 장식용의 영락(瓔珞,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은 종별도 다양하여 그 이전의 반가상에서는 보지 못했던 보기 드문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삼국 통일기에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세 나라의 백성이 모두 마음을 기댈 곳이 필요했기에 미륵신앙이 매우 성행했던 듯하고 이 반가상도 그런 사람들 마음의 표현일 것이라고 추측한단다.

이 반가상은 원래 아담한 목조법당 안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근세에 이르러 그 장소를 탐내던 어느 사람의 손으로 파괴된 사실이 재차 발굴조사에서 밝혀져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별석으로 함께 발견된 약 70cm 가량의 둥근 연화문(蓮花紋) 족좌(足座)는 내려놓은 반가상의 왼쪽 발 대좌로 보고 있는데, 본체와 함께 신라시대의 가장 우수한 작품의 하나로 꼽힌다.

이 반가상은 양식면에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불교예술품인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비교될 정도로 우수한 작품이며, 왼손 위치와 오른쪽 무릎의 팽창, 예리하고 지극히 사실적인 옷 주름, 화려한 구슬 장식 등 뛰어난 조각기법이 돋보이는 불상이다.

이 반가상은 전체적으로 탄력 있고, 당당하며 볼륨이 강조된 독특하고도 사실적인 표현수법으로 보아 7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뒤에 이 반가상이 출토된 지리를 다시 발굴했을 때 반가상을 앉힌 전각 자리가 조사되었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자그마한 전각 자리가 민묘 2기 사이에서 발굴되었던 것이다. 반가상은 그 무덤 사이의 자리에 동남향하여 앉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자연 암반으로 불단을 삼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 양쪽에는 협시상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흔적도 있었다.

주위에서는 여러 시대에 걸친 기와조각이 수습되었는데, 대부분은 고려시대의 것이었으며, 그 가운데 「大寺」, 「金堂瓦」, 「勿也」,「天德三年」(1151년) 등 글씨가 새겨진 기왓장도 출토되었다고 한다.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 경주 부근에서,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 가까운 초암사에서 출토되었으니 보물 제997호인 석조미륵반가상이 출토된 이 지역 어딘가가 일본 국보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포함한 우리나라 반가사유상의 발원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어렴풋한 추측을 해본다. 현재 석조반가상이 출토된 이곳 구산마을에는 1966년 1월 8일 경북대학교박물관에서 세워둔 <반가사유상 발견지>라는 작은 표지석만 외로이 남아 그 옛날의 영화를 짐작시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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