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안 최상호(시조시인, 본지논설위원)

부끄러워지면 얼굴부터 붉어지는 게 사람이다. 옛 사람들은 탈을 쓰거나 가면을 씀으로써 부끄러움을 잊고 낯 뜨거운 언행을 할 수 있었고, 양반네들은 그들을 광대라고 비하했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점잖은 사람들이 대우를 받고, 경우에 따라 언행이 달라지면 이중인격자라는 멸시를 받는다.

현대는 SNS라는 공간에서 대개 익명을 보장받으며 주장과 의견을 제시하고 남을 무시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아니면 말고 식의 비평 비판이 난무한다. 별 관계도 없고 영향도 받지 않으면서 마치 불공대천지 원수인양 인권을 침해하기도 한다. 이를 ‘악플러’라고 하는데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해 낸 연구가 있다. 사람은 심리학적으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으면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고 한다. 미국 스탠퍼드대 필립 짐바르도 교수는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을 2개 그룹으로 나눈 뒤 번갈아 가며 상대 그룹에 전기충격을 가하도록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두 그룹이 서로 얼굴을 볼 수 있고, 이름도 알려주도록 한 뒤 실험을 실시했다. 반면 두 번째 실험에선 전기충격을 가하는 그룹의 얼굴을 두건으로 가렸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익명집단이 실명집단보다 2배 이상의 전기충격을 상대방에게 주었다고 한다. 즉 익명성이 보장되면 인간의 폭력성도 훨씬 강해진다는 걸 증명해 낸 것이다. 몇 해 전, 어떤 지방의회 의원께서 물난리를 겪고 있는 지역을 외면하고 국외여행을 떠났다가 언론사 기자와의 통화에서 국민을 설치류 ‘레밍’에 빗대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우두머리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모양새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물론 그 말이 지당하다거나 옳은 지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부 의견이고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도 분명하다. 사회적인 공분을 샀다고 하더라도 막말로 비난할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지역민들의 선택에 의해 도태되면 그만이지 않은가? 보이스피싱이 아니더라도 전화 상담을 하는 직종이나 감정노동자들에게 막말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방송 불가한 육두문자까지 섞어가며 떼를 쓰거나 해고시키겠다는 협박까지 하는 경우도 잦다고 한다. 만약 전화통화가 아니라 얼굴을 보며 얘기하는 상황이었대도 이런 상황이 일어날 것인가?

정치적 견해를 표현하는 것이라면서 ‘문자폭탄’을 날리는 경우가 늘어나서 인사청문회에서 할 말도 못하겠다고 호소하는 의원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일부 연예인들은 근거 없는 유언비어 살포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경우도 늘었다고 한다. 정보화 시대의 익명성은 이런 공갈협박을 넘어 강력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무섭다. 특히 익명성이 강하게 보장되는 사이버 공간이 범죄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점에 주목하기로 한다.

사이버 상에서는 명예훼손이나 스토킹, 성폭력 등 유형도 다양하다. 또 SNS와 포털사이트를 통해 정보가 활발하게 유통되므로 무수한 공범자가 양산될 수 있다는 점은 더욱 큰 문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익명성 때문에 최초 유포자나 가해자를 찾아내 처벌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그동안 말로만 주장됐던 인터넷 실명제가 적극 검토되어야 한다. ‘복면가왕’은 말 그대로 예능이어서 인기가 높을 뿐이다. 익명성 때문에 인간이 잔인해진다면 우리 사회는 건전하지 않다.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결국 인터넷을 이용하는 네티즌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자세가 중요하다. 영화 ‘할로우 맨’의 주인공 카인은 투명인간이 돼 완벽한 익명성을 보장받자 평소 좋아하던 여자를 성추행하고 동료를 거리낌 없이 살해한다. 현실도 다를 바 없다. 많은 연예인이 정체불명의 네티즌들이 올리는 악성 댓글에 상처받은 끝에 목숨을 끊었다. 세월호 침몰로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 역시 익명으로 날아드는 악플에 또 한 번 극심한 고통을 당해야 했다. 전화기 너머로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아무 생각 없이 두드린 문자판이나 키보드의 일타(一打)가 상대방의 가슴을 찢는 흉기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이래서야 어찌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요즘 들어서 공익광고에 등장한 당신의 의사 표현 하나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걸 강조하는 데 눈길이 가닿는 이유다. 세상에 떠도는 무성한 소문도 내 머리 속에만 가둬놓고 옆으로 옮기지만 않는다면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는 걸 명심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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