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인삼 근대화의 선구자 이풍환 선생

이풍환 선생

인삼조합 창설, 풍기학교 설립 등
선비정신을 실천하다.

▲출생과 가계
풍기 가삼재배는 500년 전 주세붕 군수로부터 비롯됐고, 풍기 인삼재배는 100여년전 구당(求堂) 이풍환(李豊煥1866-1933) 선생에 의해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하게 됐다. 풍기 사람들은 이풍환 선생을 ‘풍기 근대화의 선구자’라고 말한다.

선생은 1866년 3월 14일 개성시에서 약 20km 가량 떨어진 천냥고개 마을에서 아버지 이흥식(평산이씨)·어머니 황남하(평해황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秉原)는 대사헌부감찰을 지냈고, 아버지(宗植)는 영양현감을 지냈다.

천냥마을은 평산이씨(平山李氏,시조:이부명) 집성촌으로 대를 이어 학문을 숭상해온 집성촌이다. 선생의 자는 향백(享伯) 호는 구당(求堂)이다. 사람들은 구당(求堂)은 풍기를 구하기 위해 온 사람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구당은 큰 아버지(宗植)가 후손이 없어 양자로 들어가 큰댁에서 성장기를 보낸다. 구당은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이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호기심 많은 소년이었다고 후손들이 전하고 있다.

 

인삼관련 상장(이풍환)

▲풍기와 인연
약관(20세)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훈랑직을 거처 1896년 주사, 1900년 시종직을 지냈다. 나중에 통정대부 교지를 받기도 했다. 중앙관직을 그만 둔 선생은 부친(李宗植,영양현감)의 근무지인 영양으로 가기 위해 죽령을 넘어 풍기에 자주 머물게 됐다.

후손들의 전언에 의하면 ‘생모의 고향이 욱금동(평해황씨)인 관계로 외가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생은 소백산의 산세와 풍기인삼 재배 실태를 관찰한 결과 개성보다 환경과 기후조건이 적합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1900년대 초(30대 중반)에 풍기로 이주하여 풍기에 ‘인삼의 꿈’을 심게 된다. 그는 금계동에 터를 잡은 후 수백마지기 땅을 매입하여 인삼재배를 시작했다.

 

이풍한 선생 영결식(풍기초)

▲선비정신의 실천
선생은 몸에 밴 선비정신으로 지역민들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도를 찾기 위해 고심했다. 때로는 관직에 있을 때 친교를 나누었던 관리를 찾아가기도 하고, 지방 수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삼 재배 면적 허가를 받아 내는 등 주민들을 위한 일에 앞장섰다.

또 인삼의 재배 및 판매뿐만 아니라 인삼 재배 방법을 연구하고 지도하여 서민들의 인삼재배 면적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선비들이 모든 것을 주도하면서 백성들의 삶을 돌봤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력과 인맥을 지역민들을 위해 썼다는 것이다. 또 수백마지기 인삼재배를 했다고 하니 요즘으로 치면 많은 일자리를 창출한 셈이다.

 

장례행렬-금계동 마을 앞

▲삼업조합 창설
1907년 홍삼전매법이 제정되고 인삼 경작 허가제가 시행됐다. 선생은 농민들의 어려운 행정업무를 대행하기 위해 1908년 전국 최초 풍기삼업조합 설립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역민들의 추천으로 50여명의 발기인단을 구성하고 서명을 받아 경북도에 조합설립을 신청하여 1910년 공식적인 삼업조합이 창설됐다.

이후 인삼재배 방법 개선, 병충해 구제, 판로 확장 등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악덕 상인들로부터 농민들을 구하기 위해 1919년 조선총독부 특허국에 상표를 출원하여 허가를 받기도 했다.

선생은 농민들의 애로사항을 자기 일처럼 해결해 주었고, 이후 21년간 조합을 이끌었다.

▲빛나는 업적들
선생은 풍기 인삼산업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 경제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쳤으며, 풍기인삼의 명성을 확고히 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공양도’라는 벼 종자 개발과 보리, 과수, 양잠 등 전 농업 분야에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또 금융과 신 교육사업에도 크게 기여하는 등 풍기 근대화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금계동 뒷산에 잠들다
선생의 손자 이용배(82,서부3리) 어르신을 만났다. 어르신은 “저의 조부(李豊煥)님께서 개성에서 풍기로 이사 올 때 개성에서 배를 타고 한강 하구까지 온 다음 뗏목을 엮어 타고 단양까지와서 단양서부터는 큰독, 서적, 도자기, 궤짝 등은 지게로 지고 죽령을 넘어서 왔다”면서 “조부님은 1908년 인삼조합 창설, 1908년 풍기초등학교 설립, 1922년 풍기금융조합 설립 등 지역 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셨다”고 말했다. 

1933년 67세를 일기로 작고하니 면민이 뜻을 모아 풍기면장(葬)으로 치루어졌다. 그 장엄한 의식이 풍기초등학교에서 금계리 장지(葬地)까지 수백여 만장(挽章)이 긴 행렬을 이루었다고 하니 그분의 고귀한 업적을 짐작할 수 있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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