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수원 화성에 있는 창성사지진각국사탑비

고려조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가진 승려는 두 분이었던 것 같다. 1178년(고종)에 출생한 전남 화순출신의 진각국사 혜심(慧諶)과 1307년(충렬왕 33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난 진각국사 원응(圓應) 스님을 말한다.

고종 때의 진각국사 혜심의 이름은 최식(崔寔)이고, 당시 나주 화순현 태생이다. 어머니 배씨가 하늘의 문이 활짝 열리고 또 3번이나 벼락을 맞는 태몽을 꾼 다음 혜심을 낳았다. 태어났을 때 태반이며 탯줄이 겹겹으로 얽힌 것이 승려가 가사(袈裟)를 입은 모습과 같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뜻대로 혜심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개경의 태학(太學)에 들어가 공부했으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출가(出家)하여 승려가 되었다. 어머니의 천도제를 올리기 위해 인근 수선사의 고승을 찾아갔는데, 그 고승이 바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었다. 그는 그렇게 출가해 지눌의 제자가 되었고, 지눌이 입적(入寂)하자 그의 대를 이어 선사(禪師), 대선사를 제수 받았으며, 열반 후 고종이 시호를 내리고, 부도(浮屠)의 이름을 ‘원소지탑’이라 사액(賜額)하였다. 혜심의 「진각국사원소지탑비(眞覺國師圓炤之塔碑)」는 이규보(李奎報)가 찬하여 전남 강진군 월남사(月南寺)에 세웠다. 보물 제313호이다.

또 한분의 진각국사 원응(圓應)의 이름은 배천희(裵千熙)이고, 호는 설산, 포항인근 흥해현에서 태어났다. 13세에 화엄종(華嚴宗)인 반룡사의 일비대사에게 머리를 깎고 19세에 승과에 합격한 후 금생사, 낙산사 등 10여 사찰의 주지를 지냈고, 부석사 주석을 마치고 수원 창성사에서 76세(법랍 63세)로 입적했다.

그의 나이 61세가 되던 공민왕 16년에 국사가 되었고, 66세부터 부석사에 주석하면서 퇴락한 당우와 가람을 크게 복구하였다. 공민왕의 존숭으로 국사로 책봉 받았는데, 다른 선사들과는 달리 왕이 직접 배천희를 찾아가 제의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사후에 진각이라는 시호와 함께 ‘대각원조’라는 탑호를 하사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대학자 목은 이색(李穡)으로 하여금 비명을 쓰도록 했다. 혜잠(惠岑)의 글씨로 새겨진 원응의 「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眞覺國獅大覺圓照塔碑)」는 보물 제14호로 지정되어 현재 수원 화성에서 보존되고 있다. 그는 임금과 백성이 함께 우러러 본 고승이었다. 왕은 배천희 국사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흥해현을 흥해군으로 승격시켜 주었고, 후손들은 위패를 모신 국사당 경앙재에서 매년 향사를 지낸다.

승려들은 원래 화장(火葬)을 하는 것이 보통이나 특이하게도 배천희 진각국사의 무덤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는, 지금의 유허비각 자리에서 활을 쏴놓고 말을 달려 무덤이 있는 곳까지 와 화살을 찾으니 화살이 보이지 않아 화살 보다 늦은 말이라 하여 말의 목을 치고 보니 화살이 말 엉덩이에 꽂혀 있더라하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리고 그의 유허비가 있는 곳은 아주 깊은 산중인데도 야생동물들도 그가 키운 가축들은 헤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향사 때마다 방사되어 있는 생닭을 잡아 그대로 제물로 사용한다고 한다.

「국사배선생유허비(國師裵先生遺虛碑)」는 흥해읍 학천리 포항공원 묘원에서 서쪽으로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가끔은 무속인들이 다녀간다고 한다. 배천희국사사당(裵千熙國師祠堂)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4km정도 떨어진 천곡사 바로 옆에 있다. 국사의 묘소는 사당에서 북쪽으로 다소 떨어진 흥해읍 양백리 마을 뒤 백산에 있다.

이곳에서는 배장군 무덤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무덤 앞 망주석이 당간지주 형태로 양쪽에 우뚝 서 있다. 무덤 건너편에 배국사가 타고 다니던 말을 묻었다는 말 무덤도 있다. 배천희 진각국사는 2009년 포항시 인물로도 지정되었다.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화엄종 국사로서 원나라에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로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의 명을 받아 창건된 사찰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창건 후 부석사는 여러 차례 병화로 소실되어 9세기, 11세기, 14세기에 걸쳐 크게 재건축 되었다고 한다. 14세기 1376년(고려 우왕 2) 진각국사 원응(圓應)이 마지막으로 고쳐지은 것으로 묵서명이 확인한다. 그러니 우리나라 고건축물의 상징이 된 현재의 무량수전과 조사당은 진각국사 원응의 손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세계문화유산의 기저를 만들어낸 큰 승려로 기억해야 한다.

진각국사 원응은 당시 나옹화상(懶翁和尙)과 함께 뛰어난 승려에게 부여되는 증명법사(證明法師)가 되기도 했고, 부석사에 주석하는 동안 워낙 많은 일을 해 부석국사(浮石國師)라는 별명을 듣기도 했던 고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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