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냇물을 지나 금당~하가타암에 이르렀다. 중가타암의 위에서 동쪽으로 들어가면 보제암과 절이 있고 하가타암 곁에는 진공암이 있는데 중이 와병중이라고 하여 들리지 않았다. 하가타암을 내려오다가 냇물을 건너면 바로 관음굴에 올라가서 머물러 잤다.

이튿날 을축일(乙丑日). 산을 내려오다가 산 아래 반석이 넓게 깔리고 맑은 물이 그 위로 콸콸 옥을 부수는 듯한 물소리가 시원스럽다. 양편의 냇가에는 목련이 활짝 피었다. 나는 지팡이를 꽂아놓고 냇물에서 세수를 하고 같이 물장난을 즐겼는데 참으로 유쾌하였다.

종수가 하는 말이 <시냇물은 응당 웃으리라. 옥을 찬 나그네(벼슬에 있는 사람을 말함)아무리 씻으려고 해도 씻기지 않는 세속티끌의 자취를……>시구를 읊고 나서 <이게 누구란 말입니까?>해서 서로 쳐다보며 한바탕 웃고 담화를 나누다가 시(詩)한수를 쓴 뒤에 일어났다.

냇물을 끼고 두어 마장쯤 걷는데 숲과 절벽구렁이 모두가 좋은 경치였다. 갈림길이 나서자 모두가 잠시 쉬었다. 응기와 종수 등 여러 중들은 여기서 초암골로 돌아가고 나는 박달고개쪽으로 향했다.

작은 박달고개에 이르러 가마를 버리고 걸었는데 인마(人馬)가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타고 내를 건너 깊은 골짜기를 지나서 큰 박달재를 넘으니 곧 상원봉의 한 갈래가 남으로 달리다가 허리가 조금 낮아진 곳에서 상원사(上元寺)가 두어 마장 거리라고 하였으나 나는 오르기에 힘겨워서 그만 두었다.

내려오다가 비로전(毘盧寺인듯)옛터아래 냇가 바위에서 쉬었다. 그때 허간(許簡)씨와 아들 준(寯)이 고을에서 찾아왔다. 맑은 냇물과 무성한 수목이 좋아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였다. 그 바위를 비류암(飛流岩)이라 이름 하였다.

이윽고 욱금동을 거쳐서 고을에 도착을 하였다. 소백산에는 숱한 바위며 구렁의 경치가 있고 절이 있는 곳과 사람 발길이 있는 길은 대개 세 골짜기로 구분된다. 초암사, 석륜사는 산의 중앙 골이요, 성혈사, 두타사 등은 산의 동편 골이며, 가타암(加陀庵)은 산의 서편 골이다. 등산하는 이들이 초암~석륜을 거쳐서 국망봉에 오름은 길은 편함을 취함인데 힘이 지치고 흥취를 다하면 하산을 한다. 주 경유(주세붕)같이 기이함을 좋아하는 사람도 주로 중앙 골을 이용하였다.

그의 유산록이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실상은 거의가 산승(山僧)에게 물어서 얻은 것이고 목격하고 노력해서 얻은 것은 적다고 한다.

그러기에 그가 명명한 광풍대, 제월대, 백설봉, 백운봉 등이 모두가 중앙 골에 있고 동쪽 서쪽 골짜기는 미치지 못했다. 나는 병약한 몸으로 한 번에 넓은 소백산의 경치를 다 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동편 골은 뒷날로 미루고 서편 골을 찾은 것이다. 서편 골에서 만난 경치는 백학봉, 백련봉, 자하대, 연좌대, 죽암대 등이고 이름 짓기를 사양치 않은 것은 주경유(주세붕)도 중앙 골에서 그렇게 했음이다.

내가 처음 주경유(주세붕)의 유산록을 백운동서원의 유사 김중문(金仲文)에게 얻어 보았는데 석륜사에 갔더니 그 유산록이 판자에 쓰여 벽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 시문의 웅건함과 기발함을 칭상하여 가는 곳마다 펼쳐서 읊곤 했는데 마치 홍안백발의 늙은이와 거기서 서로 수창(酬唱. 시가를 서로 주고받음)하듯 하여 흥겨웠다. 등산에는 기록이 있어야 하고 기록이 있음은 산을 다시 보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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