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국립중앙박물관 벽면의 훈민정음 언해본 서문

한글이 반포된 1446년(세종 28)에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수양대군[후에 세조]에 의해 불교서적이 한글로 번역된 책이 『석보상절(釋譜詳節)』이다. 여기서 ‘석보(釋譜)’는 석가의 일대기, ‘상절(詳節)’은 중요한 것은 상세하게 쓰고 그렇지 않은 것은 끊어버린다는 뜻이다. 수양대군이 신미(信眉, 속명 金守省)대사와 그의 동생 김수온(金守溫) 등의 도움을 받아 편찬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읽은 세종이 이듬해 각각 2구절에 따라 찬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은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친다’는 뜻으로, 즉 달은 하나지만 모든 강에 다 비치듯이 부처가 하나지만 모든 사람의 가슴에 골고루 들어와 있다는 절묘한 표현이 된다.

후일 즉위한 세조가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새롭게 불교대장경을 편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월인석보(月印釋譜)》이다. ‘월인(月印)’은 달빛을 지칭하는데 불가에서는 중생의 가슴에 비치는 부처의 자비로 해석하고 있으며, ‘석보(釋譜)’는 석가모니의 년보 즉 그의 일대기라는 뜻이므로, 《월인석보》는 ‘중생에게 달빛과 같은 자비를 베푸는 석가모니 부처의 일대기’를 다룬 문헌으로 풀이될 수 있다. 또한 이 서적들은 우리나라 최초로 불교서적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어서 조선 전기 불교와 훈민정음(訓民正音)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월인석보》 편찬은 세종 말엽에서 세조 초엽까지에 걸친 약 13년 동안에 이룩된 큰 사업으로, 15세기 국어 연구에 더 없이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한문으로 작성된 석가모니의 연보(年譜)를 초창기 훈민정음으로 번역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어의 문장 구조에 어긋나지 않도록 매우 자연스럽게 번역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월인석보》는 훈민정음으로 지은 초기의 문헌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간행된 어떤 문헌보다도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편찬되어 그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월인석보》는 총 25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초간본 권1, 2, 7, 8, 9, 10, 11, 12, 13, 14, 15, 17, 18, 19, 23, 25 이렇게 16권에다 재간본 3권(4, 21, 22)을 합하여 총 19권이다. 이 중 권1, 2는 희방사가, 권7, 8은 비로사가 원 소장처여서 우리지방과 관련이 깊다. 더구나 희방사본 권1 책자 맨 앞머리에 훈민정음 언해, 다음에 석보상절 서문, 월인석보 서문이 차례로 실려 있다. 여기에 실려 있는 훈민정음 언해 서문이 바로 <나랏말 미…>로 시작되는 그 유명한 훈민정음 서문인 것이다.

《월인석보》 권1은 총 108장에 이르는데, 세조의 명에 의해 당시 편찬 사업에 종사한 사람은 당대의 불학(佛學)을 대표하는 신미(信眉)를 비롯한 수미·설준·홍준·효운·지해·해초·사지·학열·학조 등의 10명의 고승이다. 거기에다 유학자 김수온이 가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총 가담자는 11명이다. 수미·설준 등은 신미의 도반이며, 학열·학조는 신미의 제자이고, 유학자 김수온은 신미의 친동생이다.

따라서 《월인석보》는 훈민정음 제정에 깊이 간여하였던 신미대사가 주도하였으며 그의 동생 김수온이 동참한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김수온은 지영주사(知榮州事, 영주군수) 교지를 받게 된다. 그리하여 중앙의 집현전 학사였던 김수온은 이 고을 지방관으로 영주와 인연을 맺게 된다. 영주는 그와 함께 집현전에서 같이 연구를 하던 김증(음운학자), 김담(천문학자) 형제의 고향이기도 했다. 김수온이 영주군수로 내려오긴 했지만 그의 불서 및 훈민정음 관련 관심은 이후에도 중단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월인석보》 간행 110여년 뒤인 1568년(선조 1) 희방사에서 월인석보를 복각한 일이 있었다. 이로써 희방사가 일찍부터 전국에 알려진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이 사업으로 희방사는 판목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같은 역할을 하는 중요한 사찰 반열에 오르게 된다. 때문에 《월인석보》등의 판목 200여장도 희방사라는 천혜의 요새(要塞)에 감추어져 400여 년을 잘 지내왔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았던 한국전쟁으로 법당과 함께 판목이 모조리 불타는 비운을 맞게 된다. 1951년 정월 열사흘의 일이었다. 이런 국가적 보물을 소실시킴에 일말의 책임을 면하기 어려웠던 영주에 다시 복각된 판목 일부가 돌아왔다. 일부이지만, 경상북도가 훈민정음 언해 부분을 다시 복각하여 2018년 6월 26일 희방사에 돌려준 것이다. 판목이 소실된 지 67년 6개월만의 환향이었다.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