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17] 가흥1동 ‘대부내’

조선 말 개척된 마을, 해방 후 소개령으로 폐동
최근 한우촌으로 변신, 우시장·가흥신도시 인접

대부내 마을전경
나매기 전경

가흥1동 대부내 가는 길
대부내 마을은 시민운장 서쪽 산 너머에 있다. 제2가흥교(시민운동장) 사거리에서 가흥신도시방향 400m 지점 첫 신호등에서 좌회전한다. 영주우시장 방향 소로(小路)를 따라 200m쯤 가면 수령 200년가량 되는 느티나무 한그루가 나타난다. 대부내 마을 동수나무다.

여기서 100여m쯤 앞으로 더 가면 대부내 삼거리가 나온다. 우측 길로 접어들어 지하차도를 빠져나가면 나매기, 우시장, 구름실이 나오고, 왼쪽 길로 100여m쯤 가서 굴다리를 통과하면 대부내 마을과 대부저수지(大富池)가 나타난다. 지난달 15일 대부내 마을에 갔다. 이날 대부내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이종운 통장, 김영수 씨, 남호순 부녀회장, 강대식 반장을 만났다. 그리고 대부내와 구름실, 나매기를 둘러보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대부내
조선 태종13년(1413)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영주는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160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리방(里坊)으로 정비할 때 대부내 지역은 가흥리(可興里) 대사방(大寺坊,한절마)에 속했다.

1700년경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개편할 때 가흥면(可興面) 대사리(大寺里)로 개칭됐다. 대부내는 작은 마을이어서 독립된 행정구역을 갖지 못하고 대사리에 속한 마을이었다. 1914년 일제 때 영주군 영주면 가흥리 대부내가 됐다가 1940년 영주읍 가흥리 대부내, 1980년 영주시 가흥1동 대부내, 1995년 영주시 가흥1동 2통 4반 대부내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형성과 폐동 내력
대부내 마을이 언제 형성됐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변천사를 기록한 영주지(榮州誌), 삼읍지 등에도 ‘대부내’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러다가 1984년 경북교육위원회에서 발간한 지명유래 총람에 ‘대부내(大富川)·대부촌(大富村)이 나오고, 2010년에 발간된 영주시사에 대부내(大富川)의 유래가 나온다.

대부내에서 태어나 지금은 구름실에 살고 있는 임명희(85,선산임씨) 할머니는 “저의 선대(先代)는 본래 충청도에 살았는데 할아버지께서 대부내로 이사 와서 살게 됐다”면서 “할아버지께서 이 마을에 왔을 때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어릴적 대부내에는 13가구 정도 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대부내 출신 김영수(72,한절마) 씨는 “우리는 선성김 백암공 후손으로 서귀대 귀학정 아래 살다가 할아버지께서 대부내로 이거하였다고 하니 아마도 일제 초쯤(1920년경)이 아닐까 추측된다”면서 “해방 후 좌우익 이념 대립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빨갱이들이 출현하여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건이 발행하자 1948년 제 나이 1살 때 소개령(疏開令)이 내려 한절마로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영주향토사의 기록과 인터넷 검색, 지역 어르신들로부터 들은 정황을 종합해 볼 때 대부내는 조선 말 1850년경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흥동과 대부내의 유래
조선시대 때 영천군(옛 영주) 소재지에는 봉향리(奉香里), 산이리(山伊里), 망궐리(望闕里), 가흥리(可興里)가 있었다. 또 가흥리에는 줄배방(茁排坊,줄포), 이현(梨峴,배고개), 대사(大寺,한절마), 반곡(蟠谷,서릿골), 초곡(草谷,한정) 등 7개 방(동네)이 있었다.

1600년경 영천의 선비들이 모여 (행정구역) 방리(坊里)의 지명을 정할 때 중국 지명이나 고사(古事)에서 많이 따왔다. 예로 옛 영천군의 망궐리(望闕里)의 경우 공자의 고향마을 궐리(闕里)를 그대로 따와 앞에 바랄 망(望)자를 붙여 망궐리(望闕里)라 했다.

가흥리의 ‘가흥(可興)’이란 지명 또한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 했다고 하여 문헌을 찾아봤으나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지역 사학자들에게 여쭈었다. “가흥(可興)의 ‘가’는 옳을 가(可)자로 미래의 가능성을 뜻하는 말이고, ‘흥’은 흥할 흥(興)자로 ‘일어나다’ ‘번성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면서 “미래에 ‘크게 번성할 마을’이라는 뜻에서 ‘가흥(可興)’이라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대부내는 당시 이곳에 살고 있던 선성김씨·선산임씨 문중이 「큰 부자가 되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대부내(大富川)’라 했다」고 한다

가흥1동 이종운 2통장은 “옛 선조들이 ‘가흥’이란 지명을 참 잘 지은 것 같다”며 “지금 가흥동은 가흥신도시로 크게 번성하고 있다. 또 대부내 마을은 예전에는 도심 변두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가흥신도시에 근접해 있다. 이런 걸 가지고 선견지명(先見之明)이라 한다”고 말했다.

우시장 경매풍경

영주 우(牛)시장의 역사
지금 영주우시장은 대부내 언덕 위에 있다. 영주에 장이 서기 시작한 것은 1914년이다. 당시 현 분수대(신한은행)에서 하망동성당 방향 골목에 난전과 미곡시장, 잡화상이 들어서고, 나무전골목이 생겼다.

김제만(90,가흥1동) 원로는 “1910년 한일합방 후 조선총독부가 시장 설립을 추진하여 1914년 하망동(현 중앙초) 지역에 우시장을 설립한 것이 시장의 시초였다. 1945년 중앙국민학교 설립으로 현 공설시장(5거리) 자리로 옮겼다가 공설시장이 확장되면서 1957년 구성공원 아래 현 우체국 자리로 갔다가 도시계획에 밀려 1970년대 다시 전문대학 교문 서편(현재공터)으로 이전했다”고 말했다. 강대식(62) 내부내 (2통4반) 반장은 “당시 우시장에는 말뚝에 소를 매고 중계인이 흥정을 붙여 매매가 이루어졌다”며 “소전 주변 임시 천막식당 가마솥에서 설설 끓는 돼지국밥이 먹음직스러웠다”고 했다. 영주축협 서중오 계장은 “5일, 10일, 15일, 25일 우시장이 열린다”며 “출품 농가의 경매신청에 의해 예비심사-최저가 산정-경매진행 순으로 진행되는데, 새벽부터 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실제 경매는 9시부터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김도연 상무는 “전문대 옆에 있다가 1995년 대부내로 이전했다. 예전에 말뚝 흥정으로 매매되다가 2013년부터 전자입찰경매로 바뀌었다”며 “현재 5일장마다 평균 250두에서 300두 정도 경매되고 있다”고 말했다.

 

유레코 농장

박인비 선수의 굴삭기 이야기

박인비 선수와 굴삭기


골프선수 박인비가 지난 5월 강원도에서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두산매치플레이 챔피언십에서 우승하여 부상으로 굴삭기를 받았다. 당시 TV에 나온 박인비는 “대회 우승 상품으로 받은 굴삭기는 경북 영주에 있는 아버지 농장에서 쓰도록 하겠다”면서 “큰 의미가 있는 상품이라서 팔아서는 안 될 듯 싶다”고도 했다. 구름실 우시장서쪽 500m 지점에 넓은 잔디광장과 황토기와집이 있어 가봤다. 입구에 「(주) 유레코 농장」이란 간판이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대부내농장”이라고 했다. 농장관리인 이지모(64) 씨를 만났다. 농장의 내력을 물었더니,이 씨는 “㈜유레코는 박인비 선수의 할아버지 박병준(88) 대표가 설립한 패트병제조회사”라며 “지금은 아들(박인비의 아버지)이 대표로 있다. 박 선수 할아버지는 ‘어린 인비의 귀여운 스윙에 반해 미국으로 유학 보내 골프여왕으로 키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레코 농장은 2007년 매입하였으며, 산지(山地) 포함 55만평이다. 박 회장님께서 가끔 오셔서 황토방에서 쉬다 가신다. ‘굴삭기’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대부지

대부내 사람들
영주교육지원청 앞 도로변 대형표지판 아래에 보면 ‘대부내’라고 쓴 작은 표지판이 보인다. 한절마 경로당 앞에서 여성 한 분을 만나 길을 물었더니, 이 분이 가흥1동 2통 남호순(62) 부녀회장이었다. 남 씨는 “대부내는 시민운장쪽으로 올라가다가 우시장 쪽에 있는 마을”이라며 “예전에는 도심 변두리 산 속에 숨은 피난지였는데 지금은 가흥신도시와 아주 가까운 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구름실에 사는 한숙이(73) 씨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구름과 안개가 늘 끼어있으므로 ‘구름실’이라 부른다”며 “예나 지금이나 띄엄띄엄 서너집 살고 있다”고 말했다. 대부지(大富池) 옆 고추밭에서 신현우(58)·배영애(55) 씨 부부를 만났다. 신 씨 부부는 “이 대부저수지는 일제강점기 때 축조됐다는 이야기를 어르신들로부터 들었다”면서 “예전에는 이 지역이 모두 논으로 벼농사 중심 농업이 성했으나 지금은 밭으로 변해 고추, 깨, 약초, 채소류 등 특용작물을 재배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부지 남쪽에 살고 있는 강병인(44) 씨는 “지금 대부내는 한우촌이 됐다”며 “대부지 안쪽 골짝에 대형 축사가 10여 곳 있다”고 말했다. 

권오석 씨

이 마을 권오석(57) 씨는 “대부내는 해방 후 빨갱이 사건으로 마을이 없어졌다가 1960년대부터 다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며 “1980년경부터 축산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축산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이종운 통장(가흥1동2통)
김영수 씨
남호순 부녀회장
임명희 할머니
강대식 반장(2통4반)
이지모 씨
한숙이 씨
신현우 씨
배영애 씨
강병인 씨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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