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16] 봉현면 오현1리 ‘남원’

조선시대 때 관원과 행인·상인들이 유숙하던 원(院)
지금, 옛 원(院)의 역할 재현으로 호텔·식당가 즐비

남원마을 전경
1930년대 봉현면사무소

오현1리 남원 가는 길
영주에서 자동차전용도로를 타고 죽령방향으로 가다가 풍기로 내린다. 봉현교차로에서 IC 반대방향 오현로를 따라 300m쯤 가면 봉현면사무소가 나타나고, 200여m 가량 더 가면 오현1리 남원마을이다. 지난 11일 남원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황용진 이장, 김태점 노인회장, 김갑녀 전 노인회장, 황대상 씨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을 만나 남원(南院)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오현1리 ‘남원’
봉현면 지역은 삼국시대 때부터 풍기의 한 부분이었다. 풍기는 통일신라 때 기목진(基木鎭), 고려 때는 기주(基州), 조선 태종13년(1413) 기천현(基川縣), 1450년 풍기군(豊基郡)이 됐다. 조선 중기 무렵 160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오현리 지역은 풍기군 와룡동면(臥龍洞面) 흥인동리(興仁洞里)가 됐다. 
당시 흥인동리는 현 봉현초, 영주일반산업단지(직물단지), 오향골(오현3리), 엄고개(호현2리) 지역을 말하며 현 오현1리 지역에는 관에서 운영하는 원(院)이 있었다. 조선 후기 1896년(고종33)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풍기군 와룡면(臥龍面) 흥인동(興仁洞)으로 개칭되고, 흥인동 중 오향골, 엄고개 지역이 엄현동(奄峴洞)으로 분리됐다. 
1914년 일제(日帝)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순흥군, 풍기군, 영천군(영주의 옛이름)을 통합하여 ‘영주군’이라 하고, 풍기군의 와룡면과 노좌면(魯佐面)을 통합하여 봉현면(鳳峴面)이라 했다. 
당시 이곳 유지들이 모여 ‘봉현’이란 면명을 정할 때 히티재 중간쯤에 있는 봉정지(鳳停地)에서 봉(鳳)자를 따고, 여현(礪峴.히티재의 옛이름)에서 현(峴)자를 따 봉현면(鳳峴面)이라 했다. 이 때 와룡면 엄현동(奄峴洞,오향골·엄고개)과 흥인동(興仁洞)을 합쳐 오현동(梧峴洞)이라 했다. ‘오현’이란 오향골(梧香谷)의 오(梧)자와 엄현동의 현(峴)자를 따 오현동(梧峴洞)이라 했다. 그 후 1980년 영풍군 봉현면 오현1리, 1995년 영주시 봉현면 오현1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텔촌과 식당가

남원은 조선시대 풍기군 당시 관원과 행인들이 유숙(留宿)하는 국영여인숙(國營旅人宿)이 있던 곳이다. 지금도 널리 쓰이고 있는 남원다리(南院橋), 남원천(南院川)은 옛 남원의 역사적 유래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은 고려 때부터 설치되어 조선 때 번성했다고 한다. 원의 건물을 원우(院宇)라 했다.

원은 주로 교통상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어 교역의 중심역할을 하면서 상고(商賈,상인)들이 많이 이용 했다. 원(院)은 역(驛)과 역사이에 있었는데 남원은 창락역과 창보역 사이에 있었으며, 풍기군에서 관리하면서 군의 남쪽에 있다하여 남원이라고 불렀다.

옛 문헌에는 남원이 있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규모나 운영에 대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도 남원이란 지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조선 후기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현1리 황용진 이장은 “남원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는 게 맞다”며 “조선 때는 관원이나 여행자, 상인들이 먹고 자는 원(院)이 있던 곳이고, 지금 또한 교통의 요지로 많은 관광객들이 먹고 자고 묵어가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황 이장은 또 “구 면사무소 건물 뒤에 수령 500년 느티나무가 있다. 아마도 이곳에 옛 남원의 원우(院宇,원의 건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며 “일제 때(1920년경) 조선총독부가 오현리에 면사무소를 건립할 때 옛 원 터에 면사무소 건물을 지은 것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마을 황대상(70) 씨는 “옛 원(院)의 역할을 지금 남원마을이 하고 있다”며 “오현1리에는 크고 작은 식당이 20여 곳, 호텔(모텔,여관)이 7곳 등 숙박시설이 많고, 먹거리가 좋은 마을”이라고 말했다.

500년 느티나무

작은 이발관
기자가 구 봉현면사무소 위치를 찾다가 간판도 없는 작은 이발관에 가서 길을 물었다. 권춘만(76) 사장은 “앞 건물(다방)이 구 면사무소였다”며 “건물 뒤에 500년 수령 느티나무 한 그루 있다“고 했다.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고 느티나무에도 가봤다. 그리고 이튿날 다시 이발관을 찾아갔다. 마을 사람들이 “권 씨는 정말 바르게 사는 사람이고, 근면 성실한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권 씨는 “이산면 원리에서 태어나 첫돌쯤 됐을 때 다리가 아팠다. 돌팔이 의사가 창칼(가정용소형칼)로 무릎 위를 수술하다 힘줄이 끊겨 장애를 입었다”면서 “4살 때 안정 봉암에서 살았고, 이용기술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가 근로자합숙소를 전전하면서 어렵게 이용기술을 배웠다.

남원에 자리 잡은지 50년. 이웃과 함께 나누고 베풀며 산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장애를 딛고 도전과 극복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권 씨를 훌륭한 시민으로 추천한다”고 말했다. 가난의 이야기는 또 있다.

이 마을 이옥자(84) 할머니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먹고 살아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강원도에서 풍기로 왔다”며 “다행히 일자리가 있어 인삼 관련 일을 많이 했고, 엿장사, 포장마차 등 안 해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 할머니를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요 훌륭한 어머니로 칭송’하고 있다.

훈훈함이 이어지는 마을
김태점(75) 노인회장은 “오늘 기자님이 오신다고 황 이장님이 떡이랑, 과일이랑, 음료수를  사 오셔서 이렇게 근사한 다과상을 차리게 됐다”며 “우리마을은 여기계신 어르신들의 아들딸들이 찾아와 과분한 효심을 전하는 등 늘 훈훈함이 이어지고 있다. 또 어르신들을 위해 지난여름 내내 점심식사 봉사를 해온 이경희(72)·백운자(72) 씨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김갑녀(77) 전 노인회장은 “매달 마지막 목요일마다 어르신들 점심대접을 하는 산내음식당 손미경(57) 사장 칭찬을 안 할 수 없다”며 “2015년 오현1리 남원다리 인근에 식당을 연 손 사장은 지금까지 무료급식을 계속하고 있다.

또 지역 내 뜻 있는 분들이 다수 좋은 일(자원봉사 및 물품기증)에 동참하여 특별히 한우·한돈 숯불구이를 대접하기도 하는 등 훈훈한 인정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1952년 남원다리(남원→풍기)

사과의 거리, 인견의 거리
풍기IC 나들목 봉현회전교차로에 큼직한 사과조형물이 있다. 봉현면이 사과주산지라는 것을 알리는 상징물이다. 또한 봉현농공단지에서 IC로 가는 길목에는 인견매장이 줄을 잇는다. 

김홍영(51) 새마을지도자는 “영주사과 최대 주산지가 ‘봉현면’이라는 것을 알리는 사과조형물이 오현1리에 있고, 이 조형물을 중심으로 사방 통로에 사과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며 “우리마을 사람들도 대부분 사과농업·상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학영(63) 마을총무는 “1988년 봉현농공단지 설립이후 20여개 직물제조업체(풍기인견)가 입주하였고, 10여 년 전부터 대형 인견매장이 들어서는 등 인견의 거리가 조성되어 성황을 이루고 있다”면서 “인견 매장 앞 도로변이 관광버스로 북적이는 것으로 봐서 찾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정자, 김영자, 박수실, 봉현댁, 김길녀 씨
남원마을 사람들

남원마을 사람들
2009년 개관한 마을회관은 1층 경로당, 2층 회의실 및 헬스장이다. 남원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자랑 첫째로 마을회관을 꼽고 있다. 기자가 마을 회관에 갔을 때 어르신들은 누워서 편히 쉬는 분도 있고 한판 치는 분도 있었다.

김기매(83) 할머니는 “오랜 세월 함께한 친구들끼리 서로서로 돌봐주면서 의지하고 산다”면서 “오늘도 닭계장 끊여 점심 같이 먹었고, 저녁도 같이 먹고 집으로 간다”고 했다.

노좌에 살다가 50년 전 남원으로 이사 왔다는 한일남(84) 할머니는 “그 때는 논 가운데 마을이 있었는데 초가집, 기와집, 스레트집이 섞여 있었다”며 “지금은 사과 집산지로 인견촌으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남원에 60년 살았다는 임옥희(80) 할머니는 “당시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다”며 “모두 초가집이었는데 기와나 스레트 지붕으로 개량했다. 두레박샘에서 물 길어다 먹었고, 나만다리에 나가 빨래를 했다”고 말했다. 남원마을 탐방 첫날 봉현사거리에서 길을 찾을 때 조숙자(74) 씨를 만났다. “마을의 유래를 찾아다닌다”고 했더니 “시조부(張師尙,1931-1937)께서 봉현면장을 지내셨는데 당시 앨범이 집에 있다”고 했다. 조 씨가 보관하고 있는 1930년대 영주군 앨범(사진첩)에는 각 면사무소의 건물, 면장과 직원 사진, 각 학교 사진 등이 담겨 있었다. 귀한 사료를 제공해 주신 조숙자 씨께 감사드린다. 

황용진 이장
김태점 노인회장
김홍영 새마을지도자
안학영 마을총무
황대상 씨
김갑녀 전 노인회장
이기매 할머니
한일남 할머니
이옥자 할머니
임옥희 할머니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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