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흥기(소설가, 본지 논설위원)

뉴질랜드의 한 할머니 얘기이다. 연세가 팔순쯤이라는데 젊음은 서산 너머로 모습을 감춘 지 오래고 남은 것은 노쇠한 신체뿐인 안타까운 처지였다. 이 할머니는 집을 나설 때에 신분증 같은 명패가 달린 줄을 목에 걸고 다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상하게 여겨 사람들이 늘어진 줄 끝, 작은 표지에 적힌 내용을 물었다.

할머니는 ‘알림판이어요. 내가 길거리를 다니다가 사고를 당하거나 갑자기 질환이 발생하여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세상을 떠날 수 있게 해 달라고 썼어요.’라고 대답한다. 굳이 줄에 달아 목에 걸고 다녀야 하느냐는 질문에 ‘가족들은 내 뜻을 알고 있지만 밖에서 사고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요.’라고 말한다. 이른바 식물인간이 되면 존엄사를 시켜 달라는 희망사항을 밝힌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문턱은 누구나 넘어야 하고 넘기 전에 질병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회복이 불가능한 질환으로 장기간 병원이나 요양원 신세를 지면 혐오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가족들도 힘이 든다. 금전적인 부담도 크다. 뉴질랜드의 그 할머니가 아니라도 식물 같은 상태에 이른 중증의 질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 의식이 없어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식사하고 대소변을 본다면 삶의 의미는 사라진다. 애로애락의 감정이 없으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건강수명이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연로한분들도 식물이나 다름없다면 생존에 집착하여 무작정 수명을 연장하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통계도 있다.

2016년 1월 국회를 통과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에 이어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따라 금년 2월4일부터 존엄사가 본격적으로 시행된다. 호스피스의 서비스 대상도 말기 암환자뿐만 아니라 에이즈, 만성간경화 등 비암질환 말기환자로 확대된다. 회생 할 가능성이 없고 증상이 악화돼 사망이 임박할 경우에는 환자 자신 또는 가족 등의 동의로써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 법적으로 존엄사가 가능하다.

불치의 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의 죽음은 불가피하고, 약물은 고통을 한시적으로 진정시킬 뿐 치료 방법이 없는 경우, 연명치료를 멈추고 존엄사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존엄사법’ 지지자들의 주장이다. 극심한 고통이 계속되고 의술로써 회복시킬 가능성이 없다면, 생명은 무의미한 존재이기에 존엄사는 윤리적으로 자비로운 행위라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인간답고 품위 있게 마무리할 수 있다는 논리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 가량 자리보전한 뒤 눈을 감으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지만 마음대로 안 된다. 

환자가 의사를 표현할 능력이 없고, 평소의 뜻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도대체 누가 스스로 동의도 부인도 할 수 없는 의식 불명의 사람에게 죽음을 가하도록 결정할 권한을 가질 수 있는가. 누가 어떤 권리로 다른 사람에게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권위를 행사하여 그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가. 의사가 그러한 결정을 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그가 의학의 전문 지식과 의술을 가진 것과 타인의 삶을 종결지을 도덕적 권한을 가졌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어떤 의사가 내 아버지의 삶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통보받는다면 가족들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그렇다면 가족들이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역시 그럴 수 없다. 가족들 간에 경제적인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있을 수도 있고, 환자를 간병하느라 이성과 인내심을 잃었을 수도 있다. 또,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들 스스로 자신의 가족을 존엄사 시키기로 결정한 후에 얼마나 깊은 상실감과 죄책감에 시달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가족 간에 의견이 분분해서 제삼의 판단자에게 결정해 달라고 호소할 수도 있다. 직접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사람, 예컨대 법원에서 객관적으로 사태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로 위원회를 구성해서 그들이 결정하도록 할 수 있을까. 그렇게도 할 수 없다. 그들은 사태를 무사 공평하게 볼 수는 있겠지만 환자와 관련된 개인적 현실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삶을 종결짓는 사태에서는 이와 관련된 모든 현실 상황들에 대한 완전하고도 자세한 지식이 요구되는 것이다. 낯선 이들은 이런 사정을 충분하고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의식을 잃어 동의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죽음을 가하는 어떤 도덕적으로 정당한 방법도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다.’

김창호 교수는 저서, 『논리와 논술』에서 존엄사 반대자의 의견을 인용하여 기술했다.

존엄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존엄사법의 시행령에는 구체적이고도 합리적인 방안이 담겨야 한다. 식물 같은 환자일지라도 인간의 생명은 지고의 가치를 지닌다. 환자가 적극적으로 존엄사를 요망했을지라도 신중하게 실행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애초 취지를 거슬러 법이 악용될 여지도 없애야 한다. 누구나 공감하는 시행령이 시행될 때 존엄사법이 의도한 대로 환자의 생애를 품위 있게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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