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15] 가흥2동 ‘도화동’

도화동마을 전경

1946년 복숭아나무 캐내고 영주농업학교 설립
1925-30년 신작로 개통, 1932년 서천교 준공

 

1950년대 제일고 모습

가흥2동 도화동의 위치
도화동은 서천교 건너 영주제일고 주변에 있다. 학교를 중심으로 북으로 청하요양병원, 동으로 서천교, 남으로 영주종합터미널, 서로는 나무고개·꺼치실 지역이 도화동이다. 지난 1일 도화동에 갔다. 이날 나무고개삼거리에 있는 마을회관에서 박창우 8통장, 권진철 9통장, 권승한 노인회장, 정규만 어르신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을 만나 도화동의 유래와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가흥동
영주는 14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160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리방(里坊)으로 정비할 때 도화동 지역은 영천군 가흥리(可興里) 이현방(梨峴坊.배고개)이라 불렀다. 1700년경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개편할 때 가흥면 이현리로 개칭됐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영주군으로 통합했다. 이 때 도화동 지역은 영주군 영주면 가흥리에 편입됐다. 1940년 영주읍 가흥리, 1980년 영주시 가흥동, 1995년 통합영주시 가흥2동(8통,9통)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화동의 유래
도화동(桃花洞)은 제일고의 전신인 영주농업학교가 설립될 무렵 형성된 마을이다. 1943년 영주농업학교가 설립인가는 받았으나 교실이 없어 영주향교에서 개교했다. 해방 후(1946년) 도화동에 학교 부지를 마련하고 지역민들이 삽과 괭이를 들고 나와 학교 터를 닦았다.

권승한 노인회장은 “당시 학교 터를 닦을 때 산비탈에 무성한 복숭아나무를 캐내고 학교 터를 닦았다”면서 “학교 준공(1947.3) 무렵부터 학교주변에 집들이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하여 마을이 형성됐는데 마을 뒷산에 복숭아꽃이 만발하다 하여 ‘도화동(桃花洞)’이라 부르게 됐다”고 말했다.

권태홍 씨

이 마을 권태홍(84) 어르신은 “저의 선대는 줄포에 살다가 증조부께서 해방 후 농업학교 설립 당시 도화동으로 이거했다”고 말했다. 

권진철 통장이 향토유래사에서 찾은 도화동 유래에 보면 「옛날 이곳은 죽령·풍기로 통하는 길목으로 주막(酒幕)에 작부(酌婦,술 따르는 여자)들이 많아 이들을 복숭아꽃에 비유하여 도화(桃花)라 부른데서 유래하여 ‘도화동’이 됐다」고 적혀있다.

나무고개의 전설
고려 공민왕 20년(1371년) 지영주사(군수)로 하륜(河崙)이 부임하여 고을 서쪽을 둘러보고는 “서쪽이 허실하여 풍수해가 많다”고 하자 고을 사람들이 이 고개에 나무를 심고 가꾸어 큰 숲을 이루니 이때부터 고개이름이 ‘나무고개’가 됐다고 전한다.

권태로 씨

샘골에 사는 권태로(77) 씨는 “도화동 맞은편에 있는 산봉우리의 형상이 나비를 닮아 ‘나비봉(蝶峰)’이라 했다. 이 나비봉을 지나 넘어가는 고개를 ‘나비고개’라 불었는데 나중에 발음이 변해 ‘나무고개’가 됐다. 또 제일고 정문에서 가흥2동 주민센터로 가는 골목길 우측 산자락에 ‘윙거리’라는 지명이 있다. 옛날 이곳에 원(院,여관)이 있어 ‘원거리’라 부르다가 ‘윙거리’로 발음이 변한 것 같다”고 말했다. 권진철 통장은 “도화동에 복사꽃이 만발할 때면 수만마리의 나비들이 모여들어 ‘나비고개(蝶峴)’라 부르다가 발음이 변해 ‘나무고개(木峴)’가 됐다는 기록이 있다. 또 종합터미널 골짜기를 ‘도굴미’, 명품병원 앞을 ‘선지골’, 자비동산 인근 골짝을 ‘너니골’ 등 자연을 닮은 지명유래가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꺼치실의 유래
나무고개 삼거리에서 명품병원 방향으로 난 긴 골짜기를 ‘꺼치실’이라 한다. 예전에 성밑(城底)에 사는 한 선비가 하도 가난하여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나 관(棺)을 마련하지 못했다. 가난한 선비는 거적때기로 시신을 둘둘 말아 지게에 지고 이 골짝에 이르러 양지바른 곳에 터를 잡아 묘를 썼다.

그 후 가난한 선비가 쓴 묘 터가 ‘천하명당’이라고 소문이 났다. 후손이 번창하고 높은 벼슬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 소문이 널리 퍼지자 이곳 사람들은 거적때기 묘터에서 큰 인물이 태어났다 하여 ‘거적때기골’ 또는 ‘꺼적실’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에 변해 ‘꺼치실’이 됐다고 한다. 꺼치실에 사는 정춘도(75) 씨는 “도화동 꺼치실이 ‘명당’이라는 전설 때문인지 명품요양병원이 들어서고, 영주탁주가 자리 잡는 등 떠오르는 꺼치실이 됐다”며 “주변에 유명 업체들이 다수 들어온다는 소문이 자자하다”고 말했다.

 

1962년 서천교 주변 모습

신작로와 서천교
영주 최초 중학교인 농업학교가 설립(1947년) 될 당시 사진을 보면, 학교 앞으로 신작로가 생기고 미루나무 가로수가 보인다. 학교 주변은 모두 논이고 학교 앞 길 건너편에 초가집 몇 채가 띄엄띔엄 있다.

이 마을 정규만(86,1933生) 어르신은 “서천교는 내가 태어나기 한 해 전인 1932년에 준공됐다는 이야기를 선친으로부터 들었다. 1925년부터 국도 5호선 공사가 시작되어 1930년 신작로가 완공되고, 1932년 서천교가 준공되어 자동차가 다녔다”고 말했다.

김경열(75) 노인회총무는 “예전에 서천교(콘크리트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배고개 앞에서 영일초등학교 쪽으로 건너는 외다무다리가 있었다”며 “당시 도화동, 배고개, 줄포, 반지미 사람들은 외나무다리를 건거 영주장 보러 다녔다”고 말했다.

 

영주탁주(소백주) 공장

 

100년 전통 영주탁주(소백주)
탁주(막걸리)의 역사는 삼국유사에 「수로왕(首露王)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요례(?막걸리요, 醴단술례)를 빚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때 문헌에 ‘탁주(濁酒)’가 등장한다.  

정춘도 씨는 “도화동에 100년 전통 ‘영주탁주공장’이 있어 마을의 자랑”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이튿날 영주종합터미널에서 명품병원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탁주공장을 찾아 갔다.

김중겸(75) 사장을 만나 영주탁주의 역사를 들었다. 김 사장은 “1916년 일제의 주세령으로 허가받지 않은 사람은 술을 빚을 수 없게 되자 1929년부터 양조장이 생기기 시작했다”며 “이후 1950-70년대에는 동아, 신영, 영남, 조광, 남산, 진호양조장이 호황을 이루었으나 80년대 이후 농촌인구 감소, 주류문화 변화, 제조시설 노후 등으로 소비가 급격히 줄어 합동양조장이 출범하게 됐다”고 했다. 김 사장은 이어 “영주탁주는 오랜 세월 영주동 합동양조장에서 시민의 사랑을 받아오다가 정부의 위생 제일 시책에 따라 2011년 도화동으로 이전하게 됐다”며 “현대식 건물을 짓고 시설의 현대화·자동화, 첨단 기술도입, 경영의 합리화를 기하는 등 부단한 노력으로 탁주애호가들의 기호에 부흥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주탁주 054-631-2051]

 

마을사람들

 

이영숙, 김영숙, 전춘화, 김화자, 손옥희 씨

도화동 사람들
박창우 8통장은 “변두리 지역이던 도화동에 최근 영주종합터미널이 들어서고 적십자병원이 개원하는 등 큰 변화를 맞이했다”며 “터미널 건립 당시 평당 10만원하던 땅값이 최근 500만원까지 올랐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말했다. 1백여 마지기 벼농사를 짓고 있다는 안병춘(64) 영농회장은 “도화동 사람들은 예로부터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직장인들이 많았다”며 “지금 도화동엔 명품요양병원을 비롯하여 청하요양, 자비동산 등 요양시설이 많다”고 말했다.

이정호(77) 노인회부회장은 “영주탁주 김중겸 사장은 황무지를 개척하여 현대식 탁주공장을 재건했다”며 “영주탁주는 전통 막걸이의 향이 감돌고 청량감, 감칠맛, 구수한 맛이 어우러져 애호가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박필수(84) 할머니는 “우리 통장(박창우·권진철)님과 노인회장(권승한)님이 경로당을 잘 경영해 주셔서 노인들이 호강하며 산다”면서 “늘 따뜻하게 대해주는 이웃이 있어 참 고맙다”고 했다. 안동 와룡이 고향인 박선주(80) 할머니는 “나라에서 하는 일 중 노인회관 운영이 가장 잘 하는 일 같다”며 “노인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게 해줘서 나라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18살 때 이산에서 도화동에 시집 왔다는 김용희(84) 할머니는 “도화동 사람들은 농사도 짓고 공장에도 다니면서 성실하게 산다”며 “66년 동안 여기서 살다보니 세상에서 가장 살기좋은 마을이 도화동인 것 같다”고 말했다. 도화동에서 가장 전망 좋은 집에 산다는 강순례(81) 할머니는 “혼자는 외롭고 노인회관에 오면 참 행복하다. 오랜 세월 함께 살아 온 이웃과 서로 돌봐주고, 돌봄을 받으면서 산다”고 말했다. 

박창우 8통장
권진철 9통장
권승한 노인회장
안병춘 영농회장
김경열 노인회총무
이정호 노인회부회장
박필수 할머니
박선주 할머니
김용희 할머니
강순례 할머니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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