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14] 부석면 노곡2리 ‘노실’

고려 말 72은사가 두문불출 숨어 산 ‘듬실’
남절·청계동·양중마을, 천지가 모두 과수원

양지마
양지마 표석

부석면 노곡2리 가는 길
노곡2리는 백두대간 자개봉(紫蓋峰,869m)에서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에 띄엄띄엄 자리 잡은 산골 마을이다. 부석에서 단산방향으로 1.5km쯤 가다가 노곡1리 두신마을에서 우회전한다. 양중저수지, 중마 방향 과수원길을 따라 2km가량 올라가면 노곡2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 양지마에 이르게 된다. 지난달 24일 노곡2리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황보경 이장, 김세원 노인회장, 성영자 부녀회장, 김중영 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유래와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노곡마을
부석면 일대는 삼국시대 때는 고구려 땅 이벌지현(伊伐支縣)이었고, 통일신라 때 인풍현(隣豊縣)이 됐다. 당시 인풍현은 봉황산(鳳凰山) 부석사(浮石寺) 아래에 위치하였고, 소백산맥 마아령(馬兒嶺,현 마구령) 아래에 있어 영취락(嶺聚落)으로 발달했다. ‘영취락’이란, 고개를 넘는 통행인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상업지역을 말한다.

인풍현은 고려 때는 흥주·순정(옛 順興)에 속해 있다가 고려 말에는 순흥부 속현이 됐다.

조선 태종13년(1413) 행정구역을 정비할 때 인풍현은 순흥도호부 산하 일부석면(단산지역), 이부석면(용암지역), 삼부석면(소천지역)으로 분리 개편됐다. 이 때 노곡2리 지역은 삼부석면(三浮石面) 호문단리(好文丹里)가 됐다. 조선 말 1896년(고종33년) 순흥도호부가 순흥군으로 격하되고, 삼부석면은 순흥군 봉양면(鳳陽面)으로 개칭됐다. 이 때 호문단리는 상호문리와 하호문리로 분리됐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부석면 노곡2리(魯谷二里)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노실(魯室)의 유래
노곡(魯谷)은 노실(魯室)에서 유래됐다. 아주 오랜 옛날 노(魯)씨 성을 가진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여 노실이라 했다는 전설이 전해오기도 한다. 조선 중기 때는 ‘글 좋아하는 선비가 산다’하여 ‘호문단(好文丹)’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명에 실(室)자가 들어있는 마을은 신라계 지명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부석면에는 노실(魯室), 듬실, 숲실, 한밤실 등 실(室)자가 들어간 마을이 많은데 모두 신라 때 또는 고려 때 형성된 마실로 추정하고 있다. 노실에 대한 기록 중 송지향의 향토지에 보면 “조선 고종 때 노실(魯室)에 진사 김철수(金喆銖)가 우거(寓居)하면서 글 읽기를 즐겼다”란 기록이 있다. 김철수는 노실에 살면서 자신의 호를 노실의 노(魯)자에서 따 노원(魯園)이라 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이곳 선비들이 의논하여 노실의 노(魯)자에서 유래하여 노곡(魯谷)이라 이름 지었다.

듬실 전경

신라계 고려마을 ‘듬실’
노곡2리는 소백산 산간에서도 찾아보기 드문 듬(두메산골)이다. 듬실은 양지마에서 서북쪽으로 500m가량 올라가서 다시 심심산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첩첩산중이다.

영주시사에 보면 「듬실은 고려가 망(1392년)하자 72명의 은사(隱士)가 속세를 피해 이곳에 은거했다」고 기록했다. 노실마을 전설에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고려 충신 72명이 숨어살면서 ‘두문불출(杜門不出) 했다」고 전해온다.

마을 사람들은 “72명의 은사 이야기는 알 수 없으나 듬실 입구를 ‘두문동천(杜門洞天)’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를 선대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김세원 노인회장은 “듬이란 두메산골이란 뜻”이라며 “고려 충신들이 이곳에 은거한 내력은 알 수 없으나 ‘두문동천’ 이야기는 들어본 것 같다. 고려 말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면 듬실은 1600년 역사를 가진 마을”이라고 말했다. 어릴 적 듬실에 살았다는 박길양(67) 씨는 “듬실에는 벼락바위, 도장골, 싹밭두들, 불당골, 매농기골 등 지명이 많다”면서 “제 어릴 적 살던 듬실에는 10여 가구가 살았는데 산업화 때 모두 떠났다. 옛 듬실은 지금 과수원 계곡이 됐다”고 말했다.

남절마을

첩첩산중 ‘남절’
양지마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800m가량 더 들어가면 첩첩산중 ‘남절’ 마을에 이른다. 기자의 느낌으로 사람의 발길이 닿지 못할 정도로 깊은 산속이다. 그런데 이곳에도 과수원이 있고 사람이 산다. 지금은 띄엄띄엄 4집이 살지만 1960년대에는 3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5대째 살고 있는 이해동(84) 어르신은 “용수산 아래에서 ‘사람살기 제일 좋은 마을’이라 하여 ‘남제일(南第一)’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줄여서 ‘남절’이라 부른다”고 말했다.

기자가 “이런 오지에서 어떻게 사셨냐?”고 여쭈니, 어르신은 “집은 여기(남절) 있고, 농토는 양지마에 있었다”며 “추수해서 지게에 지고 남절까지 오갔다”고 말했다.

옛 청계두들

6.25와 청계두들
듬실, 남절, 양지마를 삼각점으로 할 때 그 중심에 자리 잡은 마을이 청계두들이다.

푸르고 맑은 물이 마을 앞을 흘러 ‘청계두들’ 또는 ‘청계동(淸溪洞)’이라 불렀다. 6.25 전까지 30여호가 오순도순 살아가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해방 후 좌우익 이념대립 여파는 청계두들에 까지 밀려왔다. 빨갱이(공산주의자)들이 출현하여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혼란을 겪다가 1949년 소개령(疏開令)이 내려 청계두들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게 됐다.

안상현 씨

청계두들이 안태고향인 안상현(81) 어르신은 “당시는 양지마에는 몇 가구 살지 않았고 청계두들이 큰마을이었다”며 “좌익 우익 이념대립에 휩싸여 마을이 풍비박산(風飛雹散)나면서 사방으로 흩어질 때 양지마에 와서 살게 됐다”고 말했다.

중마 동수목

홍 감사와 김 진사
용수산 동쪽에 위치한 중마는 노곡리 ‘중심’에 있다 하여 ‘중마’라 부른다. 중마는 옛 노실의 원조 마을이도 하다. 중마에는 홍감사 고택과 김진사 고택이 있었다. 옛 노실에 살았다는 홍감사(洪監司)에 대한 기록은 찾을 길이 없으나 ‘권세가 대단했다’고 전한다.

진주강 씨

노실에 살았다는 김진사(金進士)는 의성김씨 해저문중 개암공(開巖公)의 10세손 김철수(金喆銖,1822-1887)로 밝혀졌다. 186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태학(太學)에 있을 때 1871년(고종8) 서원훼철에 분개하여 유건을 벗어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숨어 살면서 독서와 저술로 여생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가 숨어 산 곳이 바로 노실(魯室)이다. 중마에 사는 문일주 씨의 부인 진주강씨(72)는 “우리집 바로 옆에 김진사네 기와집이 있었는데 ㅁ자 한옥 안채에는 계자각헌함이 있고, 말을 매는 돌이 있는 등 규모가 대단했다”며 “15년 전쯤 어떤 문중이 사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그 앞에 있는 홍감사네 집은 아직 안채 일부가 남아있다“고 말했다.

양지마에 사는 김중영(85,의성김) 할머니는 “중마에 사셨다는 김진사는 저의 친정(해저) 종증조할아버지”라며 “봉화 해저(海底,바래미)에서 태어나 3세에 천자문을 배웠는데 한 달도 안 돼 다 암송하고 다 쓸 정도로 재주가 뛰어나셨다”고 말했다.

황보경 이장
김세원 노인회장
성영자 부녀회장
최잔호 노인회부회장
박길양 노인회총무
전간남 할머니
강금순 할머니
박규하 할머니
최정흥 할머니
류금자 할머니

노곡2리 사람들
황보경(54) 이장은 “노곡2리 지역은 논이 많고 수리시설이 좋아 답곡동(畓谷洞)이라 부르기도 했다”면서 “예전에 벼농사 중심 농사에서 지금은 사과생산 으뜸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최진호(72) 노인회부회장은 “지금 노곡리는 가장 바쁜 때”라며 “추석 출하를 앞두고 막바지 사과 작업을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성영자(64) 부녀회장은 “황보경 이장님과 김세원 노인회장님이 마을을 잘 이끌어 주시고, 마을 사람들이 합력·단합하여 살기좋은 마을이 됐다”며 “특히 마을의 안주인 부녀회가 마을을 꽉 잡고 있다”고 말했다. 15살 때 노실로 시집왔다는 전간남(92) 할머니는 “오늘도 참깨 털고 고추 말리기도 하면서 부지런히 움직였다”며 “마을이 모두 건강하다”고 했다. 양지마 토박이라는 강금순(84) 할머니는 “노곡은 예로부터 산좋고 인심좋고 살기좋은마을”이라고 했다. 박규하(84) 할머니는 “예전에는 벼농사가 제일이었는데 지금은 주변이 모두 과수원으로 변했다”고 했다. 최정흥(83) 할머니는 “오늘도 보건소에 다녀왔다”면서 “나라에서 노인들이 잘 살도록 해줘서 호강하며 산다”고 자랑했다. 장수면 일계실이 고향인 류금자(80) 할머니는 “마을 앞에 양중저수지가 있어 농사짓기 좋은 마을”이라며 “이 저수지는 일제 때 마을사람들이 부역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오후 4시경 박길양 씨의 안내로 듬실, 청계두들, 남절을 둘러봤다. 저물녘 정자에서 옛 이야기를 들려주신 윤완섭, 최재영, 이돈호 씨께도 감사드린다.

황정숙,김후순,허연이,성영자,황경화,강금례,임화자,송화숙
양중정(정자)
노곡2리 사람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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