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12월 소수중학교 운동장 정지공사(지금의 소수서원 사무실 부근)를 하던 중 출토된 27구의 금동불상은 옛날 숙수사가 파(破)할 때 묻어두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 금동불상의 출토는 8.15광복 이후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가장 큰 발견이며 옛 불상연구에 특기할 사건이라 하여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일제 때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50여점의 금동불상이 발견됐다고 하지만, 그것은 모두 통일신라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금동불상 연구에 한계가 있다고 한다. 숙수사터에서 발견된 금동불상은 통일신라 이전의 불상과 통일신라 이후의 불상으로 양식과 기법이 다양해 불상연구에 새로운 자료로 크게 부상됐기 때문이다.

금동불상의 조성연대를 살펴보면 통일신라 이전에 조성된 불상이 6구이고, 통일신라 이후에 조성된 것이 15구 이며, 통일신라 전후 쯤 조성된 것이 3구이고 조성연대를 알 수 없는 것이 3구로 나타났다.

금동불상의 크기는 전체평균이 12cm이며, 가장 큰 것은 통일신라시대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17.5cm이고, 가장 작은 불상은 6.3cm으로 27구의 금동불상중 유일한 청동불상이다.

이 때 함께 출토된 꽝쇠(꽹과리)는 지름이 28cm, 두께 6mm로 황철(놋쇠인 듯)로 만들었으며 겉면에 당초(唐草)넝쿨로 테두리를 두르고 중심에 보화상(모란과 연꽃) 한 송이를 크게 새겼으며 겹줄로 둥글게 외곽을 둘렀다. 금동불상 27구와 꽝쇠가 들어있던 항아리는 크게 깨어져서 없어진 부분이 있었으나 복원을 해 보니 배 지름이 60cm이고 높이 75cm의 큰 항아리로 목 부분은 넓게 외발하고 밑바닥은 평편했으며 모래가 섞인 거친 토대로 경질이 아닌 회색으로 통일신라시대 형식의 토기였다.

지금부터 65여 년 전에 소수서원 경내(숙수사지)에서 이와 같이 귀중한 우리 문화재가 무더기로 발견됐다. 지금은 모두 서울 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고 한다. 소수서원 앞 솔숲에 있는 보물 제59호인 당간지주는 옛 자리에 옛 모습 그대로 있다.

불상좌대와 부분석재(書院의 至樂齎초석으로 쓰였음)들이 여러 개 있고 신라시대 주춧돌이 20여 개나 있으며 그밖에도 석등(石燈)의 간석으로 보이는 석재며 보상화, 무늬가 있는 벽돌 조각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으니 이는 모두 같은 시대의 것으로 숙수사의 유물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종실록(중종 16년 5월 22일)과 여러 문헌에는 <소수서원을 짓기 위하여 터를 다듬는 공사를 할 때, 놋그릇 3백여 근이 출토되어 뒤에 그것으로 서책을 구입하여 서원에 비치했다.>고 전하는데 그 놋그릇들도 필시 숙수사의 유물이었을 것이다.

솔숲 속에 있는 당간지주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당간지주 가운데 매우 우수한 것이며 불상좌대의 부분석재들을 실측해 보면, 거기에 안치됐던 불상은 부석사 무량수전의 주불(主佛)규모의 장륙존상(丈六尊像)이었으리라는 것이 전문가의 추정이다. 놋그릇 3백 근이 나온 것도 그러하지만, 한꺼번에 금동불상이 무더기로 출토되는 등 일련의 사실로 미뤄 보아 숙수사는 예사로운 사찰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옛 숙수사와 금동불상발견의 의의를 상기(想起)해 보자.

<참고. 順興誌. 順興鄕土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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