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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탐방[213] 옛 풍기읍성 동문 밖 시전(市廛)이 열리던 자리 ‘동부2리’풍기읍 동부2리 ‘장터마을’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8.08.30 11:00
  • 호수 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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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때 시전(저자거리), 일제 때 5일장 번성
풍기인삼·풍기직물·우시장 개설로 시장 활성

동부2리 마을전경
풍기중학교
옛 미곡시장
동부2리 회관

풍기읍 동부2리의 위치
옛 저자거리가 있던 동부2리는 중앙시장 동편 동부교회 주변과 중앙시장 북쪽 미곡시장 골목, 기주로 북쪽 삼일교회·풍기중학교 주변과 옛 우시장 주변 지역이다.

예로부터 풍기읍성 밖에서 가장 넓고 많은 사람이 사는 큰 마을이다. 지난 18일 오후 동부2리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김춘택 이장, 배선준 노인회장, 김도현 새마을지도자, 최순자 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동부2리
풍기는 통일신라 때 군사기지 기목진(基木鎭)이 설치되어 ‘기목진’이라 불러오다가 고려 때 기주(基州)로 개칭됐다. 조선 태종 13년(1413)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기천현(基川縣)이 됐다. 

1414년 세종대왕의 아들 문종(李珦)의 태(胎)를 은풍현 명봉산에 묻은 후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그 보상으로 은풍의 풍(豊)자와 기천의 기(基)자를 따 풍기군(豊基郡)으로 승격하고 은풍현을 풍기군에 속하게 했다. 160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때 동부리 지역은 풍기읍성 동문 밖에 있다하여 동부면(東部面) 동문리(東門里)라 칭했다.

1914년 일제(日帝)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풍기군·순흥군·영천군을 영주군으로 통폐합하면서 영주군(榮州郡) 풍기면 동부2리가 됐다. 1970년 인구증가로 동부2리 일부가 동부6리로 분리됐다. 1973년 풍기읍으로 승격되고, 1980년 영풍군 풍기읍이 됐다가 1995년 통합영주시 풍기읍 동부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춘택 이장은 “동부2리는 예로부터 풍기읍에서 면적이 제일 넓고 세대수가 많아 ‘○○면장할래? 동부2동장 할래?’ 물으면 ‘동부2동장 한다’고 할 만큼 큰 마을이었다”며 “동부6리로 분리된 후 지금도 300여세대가 살고 있다”고 말했다.      

동문 밖 저자거리
예전에 풍기읍성 동문 밖을 ‘저자거리’라 하고 서문 밖은 ‘서문거리’라 불렀다. 풍기읍성은 임진왜란 전후 무렵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의 흔적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고, 성을 중심으로 성내(城內), 동문(東門), 서문, 북문 등 지명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옛 풍기읍성의 위치를 풍기읍지 등 문헌을 참고하여 살펴보면 「성의 동쪽은 ‘지금 성내2리와 동부2리의 경계, 즉 중앙시장 동편 상가 뒤 동부교회에서 삼성마트-제일교회-풍기역으로 이어지는 선이 성의 위치」로 확인됐다. 그러면 ‘동문(東門)의 위치는 어디쯤 이었을까?’. 송지향의 향토지에 의하면 「동문 밖에 시전(저자 시市, 가게 전廛)이 있었다」고 적었다. 또 향토 사학자들은 「동부2리 미곡시장(서울한의원) 입구쯤에 동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이 마을 김운규(84) 어르신은 “조선시대 때 시전(저자거리)이 동부2리 미곡시장에서부터 순흥통로로 이어져 있었다는 이야기를 선대(先代)로부터 들었다”면서 “예나 지금이나 시전’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는데 그 마을이 바로 지금 동부2리”라고 말했다. 

5일장으로 번성했던 동부2리
우리고장에 5일장이 서기 시작한 것은 일제 때다. 1914년 순흥장이 처음 형성되고, 1919년 풍기장이 열리고 어어서 영주장, 부석장이 서기 시작했다.

풍기 5일장은 조선시대 때부터 내려오던 시전을 중심으로 장이서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미곡시장 골목에 장사꾼들이 짊어지고 와서 파는 성냥, 비누 등 생활용품과 산촌 사람들이 가지고 나온 곡식, 산나물 등을 맞바꾸는 물물교환식 거래가 이루어졌다. 1940년대 후반부터 인삼이 거래되고, 해방 후 우(牛)시장이 생긴 후 부터는 소백산 산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구름밭’이란 지명이 생기기도 했다.      

이 마을 최순자(80) 할머니는 “예전에 5일장이 번성할 때는 살거리 먹거리가 지천으로 많았는데 1980년 이후 차츰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2000년대부터는 아예 없어지고 지금은 역 앞에만 소규모 장이 선다”면서 “지금도 간혹 5일장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지만 장꾼도 사람도 없다”고 말했다.          

 

정진탁 원장
이강희 약사

서울한의원과 서울약국
김춘택 이장은 “동부2리는 서울한의원 정진탁 원장님과 서울약국 이강희 약사님이 마을의 자랑”이라며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일 뿐만 아니라 마을의 큰 어르신으로 지원과 덕담을 아끼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정진탁(82) 원장은 풍기에서 태어나 경희대학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와 한의원을 개원했다.

부인 이강희(80) 약사는 서울에서 태어나 경의대학교 약학과에 다닐 때 정진탁 학생을 만난 인연으로 풍기사람이 됐다. 

정 원장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개원 준비했으나 당시 순흥향교 전교를 지내신 저의 선친(鄭彦謨)께서 ‘풍기에 와서 개원해야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셔서 선친 뜻을 따르기로 했었다”면서 “저와 집사람은 동부2리 소재 같은 건물에 서울한의원과 서울약국 간판을 걸고 개원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강희 약사는 “풍기에 온지 55년이 됐다”며 “풍기는 자연이 아름답고, 학문(儒學)을 숭상하는 선비의 고장”이라고 말했다.

김병갑의 보물

대지이발관 김병갑의 보물

김병갑 씨

김춘택 이장이 “대지이발관 김병갑 씨에게 가면 보물이 있다”기에 대지이발관을 찾아갔다. 김병갑(72) 씨는 동부2리에서 50여년간 이발관을 운영해왔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터줏대감이라 부른다.

기자가 “보물을 찾아왔다”고 하니, 김 씨는 허허 웃으면서 “오토바이 얘기냐?”기에 “뭔지는 모른다”고 했더니, 오토바이 사진을 보이면서 “이 오토바이는 故 김계원(육군참모총장) 장군의 부친이신 김길준 장로님이 한평생 타고 다니던 것인데 저와 앞뒷집에서 가까이 지낸 덕으로 고인이 되기 전 1995년에 물려받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또 “자전거도 귀한 당시 50cc 오토바이는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면서 “장로님은 엽총을 메고 사냥개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사냥을 다니셨고, 사모님을 태우고 새벽기도를 다니기도 했다. 이 오토바이는 김계원 장군이 구입하여 부친께 선물한 것”이라고 말했다. 

동부2리 사람들

김춘택 이장
배선준 노인회장
김도현 새마을지도자
김도현 새마을지도자
신현호 노인회감사
최순자 할머니
김정순 할머니
황영식 노인회총무
최분예 씨
최정분 씨

배선준(81) 노인회장은 “누가 ‘동부2리가 어디냐?’고 물으면 ‘풍기중학교와 동부교회가 있는 마을’이라고 답한다”며 “2층 건물로 잘 지은 동부2리 경로회관(2009년) 또한 마을의 자랑”이라고 말했다.

신현호(76) 노인회 감사는 “동부2리를 상징하는 건축물을 꼽으라면 ‘풍기중학교’가 떠오른다”며 “1948년 교촌1리에서 고등공민학교(사립)로 개교하여 1959년 공립중학교로 전환, 1969년 동부2리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말했다.

황영식(78) 총무는 “동부2리는 김춘택 이장이 마을을 잘 이끌어 주고, 김도현 새마을지도자, 강옥경 부녀회장 등 젊은이들이 어른들을 위해 경로효친을 잘 하고 있다”며 “정월대보름 대동회 행사를 비롯하여 어버이날 경로잔치 등 과분한 대접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김정순(82) 할머니는 “예전에 새댁 시절부터 한마을에 오래 살다보니 ‘형님, 아우’하면서 한가족이 됐다”며 “1970년대 새마을운동할 때 15집이 한집에 500원씩 4년간 모은 돈 360,000원으로 길 닦고, 가로등 달고 그래도 남은 돈으로 관광을 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도현(61) 지도자는 “동부2리는 상업, 농업, 공무원, 회사원 등 여러 직종의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며 “그 중 농업이 제일 많은 편인데 인삼, 사과 농사가 많다”고 말했다.

최분예(76) 씨는 “김계원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동부2동 출신이고, 경북지방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된 은장도(銀粧刀) 장인(匠人) 김일갑(金一甲) 선생도 우리마을 출신”이라고 말했다.

김영순 씨

최정분(77) 씨는 “예전에 장날이면 보부상(봇짐장수·등짐장수)과 소백산 산간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성시(成市)를 이루었고, 선거 때는 유세장으로 시끌벅적했다”고 말했다. 김영순(76) 씨는 “인삼이 많이 생산되고, 풍기직물 전성기 때인 1960-70년대에는 일자리를 찾아 풍기로 몰려온 사람이 많아 장터는 발디딜틈이 없었고, 즐비한 난전(亂廛)에는 먹거리, 볼거리가 지천으로 널려있었다”고 말했다.

동부2리 마을사람들
이향숙,안성희, 황순옥, 김경자, 지숙희, 이춘옥 씨
조용식, 박정인, 홍성순, 신화선 씨

이원식 시민기자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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