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비로 불리는 조경영 시조시인

2016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전체 82.4년을 산다. 남자는 79.0년, 여자 85.5년이다. 1970년부터 매년 평균수명은 5.5개월씩 늘어나고 있다. 시대는 변화되고 점점 노년의 삶이 늘어나면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에 본지는 지역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다양한 이들을 소개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인성중점의 교육활동으로 선비상 수상
60년 이상 써온 일기, 내면 다스림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배움을 얻는 데는 마침표가 없다. 우리는 옛 성인(聖人)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인생의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다짐도 한다.
조금은 넓은 사회의 첫 시작이나 다름없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아이들은 학교에서 다양한 교육을 받으며 한 뼘씩 성장한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들 외에도 올바른 인성을 갖추기 위해 우리가 일상생활에 실천해야할 것을 가르침 받는다.
퇴직교사들 사이에서 ‘조선비’로 불리는 조경영(72) 씨는 아이들에게 반드시 배워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과 어른을 공경하는 법 등 생활철학의 글이 담긴 ‘사자소학’을 지도해 왔다. 제자들의 성장을 지켜봐왔던 그가 퇴직 이후에는 삶의 철학이 담긴 한시를 읊으며 자연 속에서 농작물을 심고 가꾸며 살아가고 있다.

▲기록하며 반성하는 삶
봉화군 물야면 두문리에서 태어난 그는 안동교대를 졸업해 1970년 3월 1일자로 봉화 봉성초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봉성이 고향인 영주문예대학 박영교 학장이 동기로 같은 학교에 근무하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가 교사로 가장 중점을 뒀던 것은 생활지도와 일기쓰기의 생활화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일기를 써온 그는 일기가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좋은 기록물이라고 했다.

병아리 교사로 봉성초에서 3년을 보내고 운이 닿아 고향이자 모교인 물야초로 발령을 받았다. 교사로 조금은 성장한 그는 시간약속을 지켜야하는 신조처럼 기본에 충실한 자세로 모범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며 제자들의 인성교육에 많은 중점을 뒀다.

“어린 아이들은 가르치고 보고 배운 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올바른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어요. 어릴 때부터 배우면 좋은 사자소학을 가르쳐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지도했죠”

그가 사자소학과 한자를 제자들에게 가르친 계기는 중학교 졸업 후 가정형편으로 고교입학을 못한 1년간 가정학습을 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께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니 옛날 훈장선생님을 모셔오셨죠. 혼자 배우기 어려워 동네친구들을 모아 함께 공부했어요. 집을 옮겨 다니며 소학부터 배워 외우고 익히고 쓰고 했죠. 처음에는 한두 줄에서 점점 늘려나갔어요”

하루 종일 공부하면서 소학 6권을 모두 배우고 외웠다. 여름에는 나무 밑에 책상을 놓고 소리도 내면서 읽었다. 소학이 끝나고 대학, 맹자, 논어를 읽었다. 이때의 특별한 경험이 많은 것을 익히고 배울 수 있었다고. 그렇게 1년 배웠다. 그런데 배움에 대한 갈증은 더해져 형편은 어렵지만 한 달 동안 입시공부를 해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조선비’로 불리는 별칭
이렇게 배웠던 것들이 그가 교사로 생활하면서 큰 자산이 됐다. 1996년 그가 장수서부초 근무당시 영주교육지원청에서는 경상북도교육청에서 발행한 ‘동현의 교훈’이란 책을 교육지도자료로 권장했다. 이 책을 교육하기 위한 지도자의 자질이 한자와 한문을 모르면 안됐다.

당시 전교생이 80명이었던 장수서부초 학생들은 ‘동현의 교훈’이란 내용으로 글씨쓰기와 선비구절을 교실에 붙이는 등 많은 교육활동을 받았다. 장수초로 통합된 2000년, 한자교육에 대한 열정과 선비와 연관된 다양한 교육활동으로 그는 영주교육청이 만든 제1회 선비상을 수상했다. 그 후부터 그는 ‘조선비’로 불리우고 있다.

2001년에는 영일초로 옮기면서 당시 이원식 교감의 적극적인 한문교육지도에 힘입어 사자소학과 한자자격검정도 지도했다. 2001부터 2003년까지 영일초 학생들은 1급부터 8급까지 한자자격검정에 응시했고 다수가 합격했다.

“인성교육에는 최고라며 사자소학 공부를 권장했어요. 자체시험을 통해 상품도 주고 학교에서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죠. 그렇게 3년 동안 교육을 받으면서 학생이 잘 읽고 쓰고 암송하니 학부모들도 호응이 높았어요”

그는 한자1급 자격과 한자 지도사 자격도 취득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 중에는 한자와 관련된 직종으로 진로를 선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리의 역사와 글은 한자를 모르면 이해가 어려워요. 한글은 70%가 한자어로 돼 있는데 한자의 훈음이 있어야 해석과 이해가 쉬워요. 요즘 학교에서 인성교육에 집중하고 있는데 학부모의 참여가 적극적으로 이뤄져야하고 아이들을 위해 바른 지도욕구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방과후에 한자교육이 사라져 안타깝다는 그는 국어와 전통문화를 알아가려면 한자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글보다 한문이 함께 있으면 이해가 더 잘된다고 했다. 글을 쓸 때도 한자를 많이 쓰기 때문에 한글 쓰듯이 쉽다고. 3~4년 정도 교육을 하면서 자연스레 외우게 되다보니 지금도 시간이 날 때마다 치매예방차원에서 읊조린단다. 그러면서 그는 인터뷰 자리에서 2000년 도산서원에서 연수받을 때 배운 내용이라며 퇴계 이황의 마음을 다스리는 삼십가지 처방인 ‘중화탕(中和湯)  삼십미(味)’를 읊었다. 그리고 경제잠(敬齊箴) 40구절도 이었다.

 

▲자연 속에서 시조를 읊다
2009년 8월 남산초를 끝으로 퇴임한 그는 그해부터 4년 동안 남부초에서 방과후 한자를 지도했다. 한자지도와 함께 평생 교직에 몸담으며 가르쳐온 인성교육을 병행했다.

“인성교육이 중요한 시점에 선비정신을 강조하고 있는데 선비정신은 그냥 머리 속에 넣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옛날에는 어릴 때부터 한자를 통해 익히는 것이 선비정신이었지요. 요즘은 일회성으로 두건과 한복을 갖춰 입고 체험하는 것은 형식으로는 될지 몰라도 선비는 아니지요”

인성교육은 아이가 어릴 때부터 부모의 계획적인 지도가 필요하다면서 이를 위해 학교에서 진행하는 인성교육에 학부모의 참여가 적극 이뤄져야한다고 했다.

몇 년 전까지 퇴직 전후 그의 삶은 인성지도로 이어지는 한자교육에 있었다. 그는 교사의 성의만큼 아이들도 자란다고 말한다.

관심과 애정을 함께 했던 어린 제자들과 생활했던 그가 3년 전부터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 식물에게 관심을 주고 애정을 쏟고 있다. 부모님을 따라 1978년 단산면에 정착한 곳에서 600평 땅에 농사를 짓고 있다.

“영주와 단산을 오가고 있는데 부모님이 살던 단산 집은 별장이라고 말해요. 3년 전에 왕대추를 30그루 심었는데 올해 많이 달렸더라고요. 올해는 감자를 직접 심었는데 20kg 정도 나와 가족과 주변에 나눠줬고 고추도 심어 농약하나 주지 않았는데 많이 달려 태양초로 잘 말렸어요.”

가꾸고 수확하는 재미가 옛날 아이들을 지도하고 배움을 깨우치는 모습을 보는 마음과 흡사해 보람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취미활동을 위해 영주문예대학에도 입학했다. 그해 겨울에는 현대시조사와 문학세계에 시조시인으로 등단해 시골생활을 하며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기록을 하고 있다.                

김은아/윤애옥 기자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