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11] 이산면 운문2리 조골(鵰鶻)

안동김·예천임 500년 세거지 조골-조문-조우골
양양군(諱 自蕃) 국불천위 별묘·노림정 등 유적

조곡마을 전경

 

문향 조곡

이산면 조우골 가는 길
영주농협 파머스마켓 앞 적동삼거리에서 평은 방향 구국도를 따라간다. 운문고개(히티고개) 마루에 이르면 ‘고려골재’ 공장이 나오고 지하차도를 지나 500m 가량 내려가면 도로변에 ‘문향조곡’이라고 새긴 표석이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산촌길을 따라 1.5km가량 띄엄띄엄 이어지는 마을이 조우골이다. 지난달 30일 조우골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임종국 이장, 김분순 노인회장, 황명옥 부녀회장, 김용균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조골(鵰鶻)의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운문리(雲文里)
영주는 삼국시대 때 날이군(捺已郡)이라 하였고, 통일신라 때 날령군(捺靈郡), 고려때 강주(剛州)-순안(順安)-영주(榮州)라 불렀다. 조선 태종13년(1413)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160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리방(里坊)으로 정비할 때 운문리 지역은 영천군 어화곡리(於火谷里) 조골방(鵰鶻坊)이라 부르다가 1700년경 면리(面里)로 개편되면서 어화곡면 조골리가 됐다. 조선 후기 1896년(고종33) 을미개혁 때 어화곡면(於火谷面)이 어화면(於火面)으로 개칭되고, 조골리(鵰鶻里)는 조문동(照文洞)으로 바뀌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영천군의 산이면(山伊面), 어화면, 말암면(末巖面) 3개면을 병합하여 이산면(伊山面)이라 하고 간운(艮雲)의 운(雲)자와 조문(照文)의 문(文)자를 조합하여 운문리(雲文里)라 칭했다.

지명유래
운문2리 전체를 ‘조우골’이라 한다. 도로변에 있는 ‘돌틈이’에서 ‘골마’까지 1.5km에 이르는 골짜기가 모두 조우골이다. 조우골의 원래 이름은 조골(鵰鶻)이었다. 조골은 수리 조(鵰)자에 송골매 골(鶻)자를 쓴다. 옛 문헌에 보면 「매 중에 가장 뛰어나고 털빛이 흰 것을 송골(松鶻)이라 하고, 매와 비슷하면서 눈이 검은 것을 조골(鵰鶻)이라 하는데 매도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지금 마을 사람 중에는 조골의 내력을 아는 사람이 드문 듯하다. 기자의 상상력과 지명유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이 마을의 지형이 조골을 닮았거나, 조골처럼 용맹스러운 무인(武人)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옛 조골(鵰鶻)마을은 조선 후기에 와서 조문동이 됐다.
‘조문동’이란 ‘마을에서 학가산 문필봉(文筆峰)이 보인다 하여 비출 조(照) 자에 글월 문(文)자를 써 조문동(照文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뒤 조곡(照谷)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주로 ‘조우골’로 통한다. 옛 이름 조골(鵰鶻)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도 그 원형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금도 ‘조우골’이라 부른다.
조우골은 12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안동김씨가 개척한 새터마, 예천임씨가 터 잡은 섬밭골(島田), 돌틈사잇길로 다녔다는 돌틈이, 다래덩굴이 우거진 초계골, 울창한 숲이 무성한 노푸레, 기와를 구웠다는 기와골, 소가 풀을 뜯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풀소난골, 집골, 양지마, 분홍골, 홍살미, 평지마을 등 12마을이다.

마을을 개천한 김개(金漑,안동인)
조우골의 안동김씨는 익원공파로 파조인 김사형(金士衡)은 조선 태종조 좌정승을 지냈으며, 시호는 익원공(翼元公)이다. 안동김씨가 조우골에 터 잡은 것은 익원공의 11세 김개(金漑,증 이조참의,1484-1535)가 1510년경 경기도 포천에서 영천으로 이거하여 이곳에 터를 잡고 마을을 개척했다. 후손 김용주(82,골마) 어르신은 “개(漑) 선조께서 당시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고, 후손들의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 판단되어 이곳에 터 잡으신 것으로 보여진다”며 “입향조 개(漑) 선조의 묘가 조우골 노푸레 뒤산에 있다. 1960년대까지 2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나 산업화 이후 도시로 나가고 지금 13세대가 산다”고 말했다.

 

양양군 별묘

예천임씨 조골 입향 내력
예천임씨는 고려의 문장가 임춘(林春)을 관조(貫祖)로 한다. 그 후손이 영주 조골(섬밭골)에 옮겨 살기는 고려말 지영주사(知榮州事,영주군수)를 지낸 즐(騭,임춘의 현손)의 7세손이고, 성종 때 형조판서에 오른 자번(自蕃)의 현손인 임철시(林哲時)에서 비롯됐다.

후손 임병양(82) 문중대표는 “자번 선조나 철시 입향조의 생졸(生卒)이 세보에 명기되지 않아 정확한 입향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양양군의 행적연대에 비추어 볼 때 자번 선조는 1420년 전후 생(生)으로 추정되며, 철시 입향조는 1520년 전후 생(生)으로 보여진다”면서 “철시 선조께서 예천에서 조곡으로 이거한 것은 1550년경으로 추산되어, 우리 예천임이 조곡에 세거한지는 약 500년(468년)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입향 후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1960년대에는 80세대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고 했다.  또 “별묘 아래 종택이 있었는데 16대 임병화 종손까지 종택을 지켰으나 퇴락하여 지금은 없다”고 말했다.         

 

노림정

국불천위에 제수된 양양군 임자번

운문2리 옛 운문초 동편에 양양군(임자번) 불천위 사당(別廟,1920년 문경 산양 과하에서 이건)이 있고, 그 맞은편 언덕에 양양군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노림정(老林亭)이 있다. 

‘불천위’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에 대하여 그 위패를 옮기지 않고(不遷) 영구히 사당에 모시면서 제사를 지내는 위패를 불천위(不遷位)라 하고, 임금이 직접 제수한 불천위를 ‘국불천위’라 한다. 영주에는 양양군 임자번, 무송헌 김담, 민절공 김륵, 연복군 장말손 등 국불천위 4위가 있다. 양양군 임자번(초명藝起)은 세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1453년(단종1) 부사직, 추충정난공신(推忠靖難功臣) 3등에 책봉, 1456년(세조2) 대호군, 1462년에 장용대장, 1466년 양양군(襄陽君)에 봉해졌다. 1467년(세조13) 오위도총부도총관 겸 내금위장, 1469년(睿宗1) 평안동도절도사와 경상좌도병마절도사, 1473년(성종5) 전라도병마절도사, 1482년(성종14) 형조판서에 올랐다. 시호는 양평공(襄平公)이며, 숙종 때 국불천위에 제수되어 별묘(別廟)에 제향됐다.  임자번은 세종조에서 단종, 세조, 예종, 성종조에 이르기까지 일평생을 오직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산 명장이요, 충신이요, 정치가였다. 양양군의 후손들이 1550년경 이곳에 터를 잡고 마을이름을 ‘조골(鵰鶻,용맹스러움의 상징)’이라 한 것은 아마도 임자번 선조를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한 지명으로 보여 진다.

임종득

양양군의 18대손 임종득(육사42기) 후손이 2012년 준장으로 진급하여 조골의 명예를 이어가고 있다. 운문초, 영광중, 대구청구고를 나온 임 장군은 2014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육군17사단장, 청와대 국방비서관 등 요직을 역임했다.  이 마을에 사는 임 장군의 어머니 강대임(83) 할머니는 “손자 한솔이도 육사를 졸업하고 현재 육군 장교(대위)로 복무중”이라며 “한솔이가 육사2학년 때 부자(父子)가 낙하산 타고 내려오는 훈련사진이 집에 있다”고 말했다.

강대임 할머니
운림천석

조우골 사람들
마을 초입에 문향조곡(文鄕照谷) 표석이 있고, 그 뒷면에 징분질욕(懲忿窒慾)이라 새겨져 있다. 임병양 문중대표는 “예전에 도전서당(훈장 임낙상)에서 공부할 때 ‘징분질욕’을 마을의 신조(信條)로 가르쳤다”면서 “‘분한 생각을 경계하고 욕심을막는다’란 뜻”이라고 설명했다. 임종국 이장은 “조우골은 예천임가와 안동김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500여 년간 세거해 온 마을”이라며 “6.25 이후 100여호에 800명 넘게 살 때 예천임이 70%, 안동김이 20%, 다른 성씨가 10% 정도였다”고 말했다.

마을 원로 서창규(85,달성인) 어르신은 “마을회관 앞에 있는 운림천석(雲林泉石)은 마을을 지켜주는 동신(洞神)”이라며 “조우골에는 나라의 기둥이 될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됐다”고 말했다. 김분순(72) 노인회장은 “조우골은 장군이 나오고 법관(3명)도 나오고, 박사가 6명에 부이사관 2명(중앙부처 근무) 등 인물이 쏟아졌다”면서 “조우골 출신들은 모두 고향 사랑이 지극하고 경로당 후원을 잘 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우원희(89) 할머니는 “임종국 이장님이 앞장서서 회관을 잘 운영해 주시고, 저온창고도 새로 지어 주셔서 고맙다”고 자랑했다. 박명희(88) 할머니는 “노인회관은 노인들의 천국”이라며 “김분순 회장님, 임 이장님, 황명옥 부녀회장님, 김용균 지도자님이 도움을 많이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손정희(87)할머니는 “조우골의 아들 임종득 장군이 별 땄을 때 마을사람 200여명이 모여 큰잔치를 벌렸다”고 말했다. 안동김씨 세보를 가지고 오셔서 입향 내력을 설명해 주신 김용필(81,평지마) 어르신, 예전에 솥 하나 숟가락 2개로 살림나 어렵게 살았다는 김영희(81) 할머니 그리고 마을의 옛 이야기 들려주신 김분행(75), 조유분(82), 손후불(75), 강춘심(78), 엄국희(53), 임은규(84), 임진규(81) 어르신께 감사드린다.

강대임,김영희,김분행,조유분 씨
부녀회장,손후불,강춘심,엄국희 씨
임은규,김용필,임진규 씨
조우골 사람들
임종국 이장
김분순 노인회장
황명옥 부녀회장
김용균 새마을지도자
임병양 문중대표
김용주 어르신
서창규 어르신
우원희 할머니
박영희 할머니
손정희 할머니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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