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자미 시인

싸움

-이상국

여러 해 전이다.
내설악 영시암에서 봉점 가는 길에
아름드리 전나무와 등칡넝쿨이
엉켜 붙어 싸우고 있는 걸 보고는
귀가 먹먹하도록 조용한 산중에서
목숨을 건 그들의 한판 싸움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적어도 싸움은 저쯤 돼야 한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었다.
산속에서는 옳고 그름이 없듯
잘나고 못나고가 없다.
다만 하늘에게 잘 보이려고 저들은
꽃이 피거나 눈이 내리거나
밤낮 없이 살을 맞대고
황홀하게 싸우고 있었던 것인데
올 여름 그곳에 다시 가보니
누군가 넝쿨의 아랫도리를 잘라
전나무에 업힌 채 죽어 있었다.
나는 등칡넝쿨이 얼마나 분했을까
생각했지만 싸움이 저렇게도 끝나는구나
하고 다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

싸움은 이쯤 되어야 한다. 보는 이가 전율을 느낄 만큼 치열해야 한다. 목숨까지 건 한판싸움은 곧 인생이다. 옳고 그름없이 저마다 안감힘으로 살아 낼 뿐이다. 잘나고 못나고 제 갈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등칡이 얼마나 분했을까 생각했지만 싸움이 저렇게도 끝나는구나 하고 생각할 만큼 때로는 억울하고 분한 것 또한 우리의 삶이다.

나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흘러갈 때도 많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 자체가 황홀한 순간이다.

다 끝났다고 생각해도 또 끝난 것이 아닌 게 싸움에서 승부이다. 등칡은 절망하지 않고 다시 새순을 낼 테니까, 수백의 손으로 다시 나무의 멱살을 잡고 승리의 붉은 꽃을 깃발처럼 꽂을 테니까.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