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진훈(영주시재향군인회 회장)

단양전투에서 악전고투하던 국군 8사단(사단장 대령 이정일)은 1950년 7월 12일 21시 작전상 죽령을 넘었고 그날 밤, 풍기국민학교에 진지를 구축하고 부대를 재편성한 21연대(연대장 중령 김용배)는 풍기 동남쪽 산법동, 동촌동, 지동리 일대로, 10연대(연대장 중령 고근홍)는 풍기 서남쪽 생현동, 대촌동, 장군봉 일대에 배치하여 V자형 진지를 편성하고 북괴군 8사단과 중공8로군 출신 병사들이 주축으로 막강한 전투력을 과시하는 12사단을 상대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당시 우리국군의 전략은 북괴군의 남진을 최대한 저지하는 것이었다. 주한 UN군사령관 Clark 장군은 8월 4일까지 지연작전을 전개할 것을 전군에 지시하고 부산을 중심으로 반호형(半弧形) 방위선을 형성했다. 그 이유는 미국 본토를 출발한 증원군 병력과 무기들을 상륙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 부산을 반드시 사수해야 했고 이미 진주를 점령한 북괴군은 부산항을 점령해 미국 증원군의 상륙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 목표였다. 

국군 8사단은 병력 무기 장비 등 상대적으로 절대 열세인 상황에서 교대 병력도 충원도 없이 경상북도 최북단 죽령이남 영주·풍기 전선에서 북괴군의 남진을 10일 동안 저지하다가 7월 23일 아침 국군장병 248명의 전사자를 남겨두고 서천을 건너 옹천으로 이동하면서 영주·풍기전투의 지연작전 임무를 목숨 바쳐 수행했다. 

이 전투로 인해 6.25전쟁 최후의 교두보인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게 됐고 UN군은 승기를 잡아 9월 15일 맥아더(Douglas Mac Arthur) UN군 총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돌파하여 압록강까지 진격을 가능케 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수호하는데 목숨 바친 호국영령들 유해는 아직도 수습 되지 못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68년 세월을 6.25전쟁 당시 피비린내 나던 전장인 깊은 산중에 아직도 차갑게 묻혀있다. 그곳이 바로 영주다. 진정한 호국안보의 의미를 되살려야 할 곳이 바로 이곳 영주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2008년 국가보훈처와 경상북도는 ‘낙동강 호국평화벨트 조성사업’으로 낙동강 방어선 동쪽으로 칠곡-영천-경주-포항-영덕의 조성지역(5개 지역)과 군위-상주-안동을 호국자원 연계지역(3개 지구)을 대상으로 순차적으로 호국벨트 사업이 추진됐다. 그러나 어떤 연유에선지 경주시와 포항시는 사업을 포기했고 제일 먼저 칠곡의 호국평화공원 사업을 시작으로 영덕은 장사상륙작전 기념공원으로, 영천은 메모리얼파크로, 군위는 효령고로지구 전투기념공원으로, 상주는 화령장전투 기념관으로, 안동은 전몰장병 추념공원으로 호국평화벨트 사업을 완료 또는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경상북도 최북단 영주·풍기 전선에서 악전고투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주·풍기 전투가 경상북도의 ‘낙동강 호국평화벨트 조성사업’에 제외됐다는 것은 영주시민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2016년-2017년 국군유해발굴단은 영주시 봉현면 장군봉, 문필봉 고지에서 육군 3260부대 3대대(대대장 양성열 중령) 장병들의 유해 발굴 작전으로 국군유해 3위를 수습하고 각종 전투 장비를 발굴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 땅이 호국안보의 현장임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며 더 늦기 전에 경상북도의 낙동강 호국평화벨트 조성사업 당시의 문서를 살펴서라도 영주가 제외 또는 누락된 경위를 밝혀야 한다. 

또 죽령 이남의 첫 관문 영주·풍기 전선의 지연전투가 6.25전쟁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국가보훈처와 경상북도에 알려 지금이라도 낙동강 호국평화벨트 조성사업에 추가 지정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영주시가 진정한 호국안보의 도시임을 천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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