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상(148아트스퀘어 전 사무국장)

▲ 거장의 변화된 시선

긴 침묵을 깨고 8년만에 돌아온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무라까미 하루끼 소설을 영화화하는 일본 방송국 NHK 프로젝트였습니다. 세계 거장 감독들에게 무라까미 소설을 영화로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해오다가, 한국의 이창동 감독이 맡게 되었다는 소식에 원작자인 무라까미 하루끼가 반가워했다는 후문이 있었습니다. 무리까미 하루끼 소설 ‘헛간을 태우다’가 원작입니다. 단편소설의 주요 뼈대만 가져오고 이창동 감독의 영상 언어로 보여주었습니다. 원작 소설보다 더 모호한 은유와 상징이 가득한 다소 낯선 영화였습니다. 물론 이창동 감독의 걸작은 초록물고기 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무라까미 하루끼 소설은 개인적인 취향과는 동떨어진 작품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낯선 영화는 오랜만에 많은 메시지를 남겨 주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전작인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에서 만났던 80, 90년대 청년들은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감당하고, 불합리한 제도와 폭력적인 권력의 희생양으로 살아가면서도 치열하고 처절했습니다.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했던 청춘의 순수함은 결국 세상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영화 ‘버닝’ 에서 만난 21세기 현대 청년들은 달랐습니다. 부조리한 세상 속의 희생양들은 여전하지만, 부모 세대에 비롯한 부 때문에 세상 해택을 누리는 아이러니한 젊음도 존재합니다. 불합리하고 모호한 세상 속에서 그들은 모두 결핍과 권태에 빠져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허무한 세상에 대해 냉소적입니다. 영화 밀양에서 세상 끝 절망의 벼랑에 서 있던 여성의 집 앞마당에 드는 태양은 그래도 무심히 따스했지만 별 볼 일 없이 사는 버닝의 청춘들이 만나는 공간의 태양은 아주 짧은 시간 힘없이 머물고 사라집니다. 이 모호하고 냉혹한 세계를 다 태워버리고 싶은 것은, 오히려 이창동의 속 마음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소외된 삶에 천착하면서도 실낱같은 희망 한 줄기는 보여주던 노장감독이었기에 더욱 서글펐습니다.

 

▲ 청춘의 버닝

별 볼 일 없는 청춘 종수는 생계형 택배를 하면서 소설을 쓰고자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뛰어들었던 박하사탕 세대의 청춘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런 부모세대와는 단절된 상황에 놓입니다. 자유로운 영혼인 해미는 이벤트 걸 아르바이트로 여행 경비를 충당합니다. 그녀는 가족에게 카드빚을 남기고 떠나 있습니다. 둘은 고단한 생활 전선에서 만나고 연대하고 청춘의 버닝은 사랑으로 밝은 빛을 보게 됩니다. 소심한 종수는 내면의 열정이 타오르고 그녀의 삶에 빠져 들 때쯤 그녀의 아프리카 여행친구인 세련된 벤을 만납니다. 월리엄 포그너를 좋아하는 종수는 위대한 캐츠비 같은 벤에게 질투심과 분노를 느끼며 어두운 새벽 빛과 분노의 붉은 색을 보게 됩니다. 절박한 종수와 해미를 보는 벤은 하품어린 미소로 그들의 청춘을 지켜봅니다. 그는 위대한 케츠비가 아니라 가식으로 가득한 거짓된 청춘이었습니다. 가벼움과 무거움 빈곤과 풍요 속 허영과 위선은 종수에게 수수께끼 같은 세상입니다. 그들의 청춘 버닝은 아름답지도 않았고 무기력하며 공허했습니다. 숨이 막힐 것만 같은 2평 남짓의 해미의 방과 벤의 60평대 반포 빌라, 종수가 사는 파주의 허름한 고향 집은 그들이 처하고 있는 청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 농촌의 청춘

영화 속 파주 농촌 모습은 내가 사는 영주가 떠올랐습니다. 종수의 고향은 버려진 비닐하우스와 빈 집이 많았고, 단절된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남북 관계를 떠드는 북한 확성기 소리에 무심한 채 버티는 것입니다. 취업 환경은 나아보이지 않고 구형에 처한 아버지의 모습은 그저 답답하기만 합니다. 우리 고장은 도심가에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이런 황량한 모습을 쉽게 접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고장에 만나는 청년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대부분 먹고사는 것에 대한 강박을 보입니다. 대학생들은 이곳을 떠나 안정된 직장을 잡기를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삶에 대한 따스한 시선보다도 과거와 전통으로 억압된 상황을 탈출하려고 도피합니다.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와 좌절은 깊어지고 서로에게 무관심으로 점철됩니다. 영화 속 농촌 모습보다 더 어둡고 잔혹합니다. 과거 농촌의 청년들은 거칠고 촌스런 기성세대의 무력에 농락당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이 시대의 청년은 도시의 매력에 빠지듯이 세련되고 매끈한 돈의 힘에 농락당합니다. 그들은 곧 늙고, 떠나온 고향을 다시 찾으러 오겠지요. 그들의 청춘은 늙지 않고 여전하다며 착각하고, 그들이 당했던 억압과 분노를 다른 청춘에게 투영합니다. 지금도 그런 반복이 보이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농촌의 청춘은 소멸은 지속되고, 도시를 경험한 청춘은 그들에게 부유하게 보이겠지만 결국은 같은 청춘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소멸 할 때까지 불타야 하는 농촌의 청춘은 실낱같은 희망 한 줄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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