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균대 할아버지

1932년의 평은면 평은리에서 태어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4살 때 어른들을 따라 만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만주에서의 5년은 힘든 시간이었고 고향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다 빼앗아 갔던 상황인 터라 고향의 따스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일제시대와 6.25사변

다행스럽게도 우리 식구들은 평은리에 계신 아버지 친구 댁의 토지를 얻어, 1년간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로는 땅을 경작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땅을 빌려 살게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어머니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항상 내 곁에 있어줄 것 같았던 어머니의 죽음은 어린 나에게 큰 슬픔이 되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집안일을 해 주실 사람을 찾아 다니셨고, 둘째 형수가 집에 들어와 도와주셨다. 이 후 둘째형수도 돈을 벌기위해 떠나셨고, 나 또한 공부를 하기위해 청량리에 계신 아버지 친구 댁으로 갔다. 어린 남동생을 아버지와 배다른 형들에게 맡겨두고 홀로 올라가 지내는 동안 걱정과 외로움이 항상 내 마음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공부를 하던 중 사변이 났다. 가족에 대한 걱정에 급히 고향으로 내려가던 피난길에서 여학생과 담임 선생님, 미군을 만나게 되었고 집까지 태워주겠다고 했다. 나는 가족들 품에 안길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하고 안심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차가 도착한 곳은 제천이었고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군복을 입고 일만 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담임 선생님께서 나에게 군복을 건네주시며 입으라했다. 그때부터 나는 미군들의 심부름꾼인 핫보이가 되었다.

 

▲ 미군 심부름 하던 핫보이 시절

핫보이로 일을 하던 중 집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집으로 가기위해 길을 나섰다. 그러나 집에 갈 운명이 아니었던 것일까. 나는 죽령군부소에서 잡혀 다시 부대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후 심부름을 하던 중 함께 일하던 군인이 풍기에서 나를  내려주며 집에 가라고 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나는 풍기로 가는 길을 몰랐고, 무작정 걸어야만 다녔다. 그러던 중 한 육군이 나를 붙잡았다. 영문도 모르고 잡혀 온지 3일이 지났을 때, 나에게 단양에 가서 사진을 찍어오라고 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그 곳에 3번가면 이중간첩이 되어 총살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귀띔해주셨다.

사진을 찍기 위해 차를 타고 가던 중 밤이 찾아오고 단산쯤에서 산중 불빛이 보여 그곳을 향해 갔다. 그곳엔 노부부가 살고 계셨다. 두 분은 우리에게 죽도 쒀주시고 다정하게 대해 주셨다. 나는 노부부에게 우리의 사정을 말씀드렸다. 군대에서 준 사진기와 돈, 비상식량을 할아버지께 드리며 사진을 부탁드렸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는 것보다 노인분들이 가는 것이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한참이 지나고 할아버지가 사진과 함께 안전하게 돌아오셨다. 너무나도 감사해서 그 당시 가지고 있던 돈을 다 드렸고, 나와 함께 다니던 여학생은 더 이상은 위험할 것 같아 그 집에 맡겨두고 나왔다. 부대로 돌아와 찍어온 사진을 주었다. 나는 또 시킬까봐 두려웠고,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서 도망을 쳤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고향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정작 고향집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가족들이 모두 사변을 피해 피난을 간 것이다. 가족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 지친 나는 친척집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군인이 찾아와 나를 끌고 갔고, 나는 17살 학도병이 되었다. 그곳에서 인민군에게 붙잡혀가 의용군이 된 친구를 만났고, 그 친구는 나에게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우리는 형식적으로 싸우는 척만 했다. 그리고 인천 상륙작전으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올라가면 죽는다고 중간에 빠지라고 귀띔해 주셨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기회를 엿보다 안동 밑에서 화장실 가는 척 하며 몰래 빠져나갔다. 또다시 걸리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해하며 도망 다니다 마침내 고향에 도착했다. 서울 친척들과 담임 선생님도 고향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만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도움 준분들이 정말 많은 것 같다. 그분들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 같아 감사하다. 지금까지 살면서 담임 선생님과 여학생에 대해 그 어떤 소식도 듣지 못해 너무나 아쉽다. 기회만 된다면 꼭 한번 만나 뵙고 싶고, 감사하단 말도 전하고 싶다.

정리_ 안소정, 김희원

청소년(영주여고 2학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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