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헌 안향 선생 영정<국보 제111호>은 1543년(중종38)소수서원을 짓고 위패와 영정을 사당에 함께 봉안했다. 소수서원을 세운 신재 주세붕 선생은 ‘안문성공발문’에서 영정을 봉안하기까지의 경과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의 영정은 본래 순흥향교에 있었는데 정축년(1457년) 사변이 일어나자(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단종복위 운동을 도모하다가 사전에 발각이 되어 일어난 사건) 순흥부가 혁파되고 일대는 불바다가 되었으며 남녀노소 모두 도륙당한 참혹한 일이 일어났다. 회헌영정은 서울에 있는 순흥안씨 대종가로 옮겨갔다. 회헌 종손 안정(安珽)의 집에 가서 영정을 참배하며 바라보니 엄엄하고 가까이하면 온화하여 실로 대인군자의 참모습이 마음에 직접 뵙는 듯하여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1543년(중종38) 3월에 선생의 종손인 안정이 사당을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영정을 모시고 내려와 임시로 고을 서쪽 루(樓)에 모셨다가 그해 8월에 비로소 새 사당(소수서원)이 완성되어서 봉안하였다.>

1318년(충숙왕5) 왕명으로 조성되었다고 전하는 선생의 영정은 같은 시대의 학자 이제현(李齊賢)영정과 더불어 고려영정의 쌍벽으로 알려졌다. 30도 각도의 좌측으로 틀어 앉은 상반신영정으로 영정에는 아들 우기(于器)의 찬기(贊記)가 있다. 이 영정의 조성연대에는 상당한 의문이 있기에 송지향(宋志香) 선생이 상고한 바를 붙인다.

“<文成公 安珦 影幀. 考> 소수서원에 봉안되어 오는 안향선생 영정은 익재 이제현 선생 영정과 함께 그 조성연대가 확실한 고려 초상화의 쌍벽으로 알려져 있다. 연대가 확실하다는 것은 그림의 위쪽에 적힌 찬기(贊記)에 의함이라 할 수 있다. <1318년(충숙왕5) 2월에 왕이 안향의 교학에 이바지한 공을 기려 그 초상을 고향 문묘에 봉안하라 하니 순흥고을의 수령 최림(崔淋)이 왕명에 의하여 영정 1폭을 그려 향교에 봉안 할 때 먼저 영정을 그 아들 안우기(安于器)에게 보내어 보이니(그때 아들 于器는 어느 변방에 있었음) 아들이 눈물을 흘리며 향불을 피워 절하고 찬기(贊記)를 지어 지어서 적었다.......>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나 이 영정이 과연 충숙왕 때 조성되었다는 그 영정일까? 송지향 선생이 살핀 바로는 매우 참람하고 성급한 추단(推斷) 인줄은 알면서도 명종때 개모(改摹)된 이불해(李不害)의 작품일 가능성이 너무나 짙기에 감히 의문을 제기하는 바이다.

이제 대충 그 이유를 제시한다. 1457년(세조3) 정축지변으로 순흥고을이 혁파(革罷)되면서 향교가 폐지되니 회헌선생 영정은 서울 종가에서 보존하다가 신재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내려와서 사당(소수서원)을 세운 후 영정을 다시 순흥으로 옮겨와서 사당(소수서원)에 봉안하였다.

회헌실기(晦軒實記)에 의하면 이 퇴계가 풍기군수로 있을 때(明宗 3년~4년) 회헌영정이 몹시 낡아서 그림이 흐리고 해어지고 떨어져 본모습을 알아보기 어렵게 된 지경이었다. 영정의 본 모습을 잃을까 두려워서 퇴계는 안 문성공의 신위에 다음과 같이 고유하였다.

<영정이 몹시 해어져서 형용을 잃을 지경이어서 보수를 하게 됨을 아룁니다.......>

뒤에 퇴계가 풍기를 떠나고 난후 꼭 10년이 되는 해인 1558년(명종13)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장문보(張文輔)는 영정을 그대로 두어서는 곧 인멸될 지경임을 걱정하여 서원장인 안적(安적)을 시켜서 예조판서에게 보낸 글에서 <제가 부임을 하고 문성공 사당에 참배를 하였는데 세월이 오래되어서 안 문성공의 영정이 희미할 뿐 더러 천의 바닥이 부서져 떨어져 나갈 지경이라 지금 고쳐 꾸미지 않으면 방불한 형용이 아주 없어질까 걱정이 됩니다. 유사 서원원장 안적(安적)을 보내어 사정을 아뢰옵니다. 겸하여 천(그림을 그릴 비단)을 사오게 하였습니다. 감사에게 상신하여 임금에게 아뢰게 되면 망령된 일이라고 꾸지람이 있을까 두렵고 만약 유사를 시켜서 예부에 고하면 차례를 무시함이 될까 고민한지가 달포가 되었사오니 바라옵건대 굽어 헤아려 주시옵고 교시해주심이 어떠하실지요?>

이에 대한 예조판서의 회답이 <안 문성공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비조이며 조정의 대신으로 선생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후인들이 사모하여 우러를 것이란 오직 영정뿐인데 그처럼 낡아서 형용을 잃을 지경이라면 어찌 후인의 흠이 아니겠습니까? 마침 실력이 높은 화가(도화서 소속은 아닌듯함) 이불해(李不害)가 집경전의 그림일로 경주에 가 있는데 그는 그림에도 뛰어날 뿐 더러 표구애도 능하여 만나기 어려운 인재입니다.

예조에서 경주에 공문을 띄워 그리로 가도록 하려니와 거기서도 순흥원장(소수서원원장)과 의논하여 정중한 인사와 예로 간청하면 마음껏 일을 할 것입니다. 듣건대 안동으로 갈참이라고 합니다.>

장 군수는 친상을 당하여 그 해 풍기를 떠나고 이듬해 1559년(명종14) 후임으로 박승임(朴承任)이 부임하였다. 그는 부임을 하자 곧 경상도 관찰사에게 안 문성공의 영정문제를 상신(上申)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예조판서 홍섬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안문성공의 영정이 몹시 해어지고 떨어져서 형적이 없어질 지경이므로 이제 그 도(道)의 관찰사가 풍기군수 박승임의 보고에 의거하여 예조에 이문 하였습니다. 좋은 화가를 구하여서 영정을 고쳐 그리기를 꾀하오니 화원 이불해로 하심이 어떠할까 하옵니다.>하니 임금이 가하다 하셨다.

그해 10월 을묘일(乙卯日)에 영정 그리기를 시작하여

 을축일(乙丑日)에 마치고 새 영정을 사당에 봉안하는 제사를 올렸다. 후손 좌의정 안현(安玹)과 찬성 심통원이 주관했고 좌의정의 아우 상이 영천군수로서 함께 힘썼다. 영정을 고쳐 그리면서 처음 그린 한 폭은 맞지를 않아서 곧 다시 그렸으며 본래의 영정과 처음 그렸던 것은 함께 궤에 넣어 사당에 간직하였다.

국보로 지정되어있는 중요문화재가 만일에라도 그 유래가 잘못 알려지고 있다면 이는 심상히 여길 문제가 아니라 생각한다. 모름지기 영정의 재조명으로 확실한 고증을 밝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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