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은어

은어는 연어류에 가깝지만, 독립된 은어과를 형성하는 유일한 민물고기로 대만, 일본, 한국, 중국(만주)에만 주로 분포한다. 주둥이의 턱뼈가 은처럼 하얗게 빛난다고 하여 은구어(銀口魚), 은광어(銀光魚)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어 표기는 <sweet fish>이다. 맑은 1급수에만 사는 깔끔한 어종이다. 비늘은 잘고 매끈하며, 몸매는 가늘고 길어 날씬하다. 30㎝ 정도까지도 자라지만, 20㎝ 내외가 보통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은어 특산지 109군데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 중 42개소가 경상도란다. 전국 40%에 이르는 최고의 은어 서식지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봉화 내성천, 울진 왕피천, 영덕 오십천 등에서 확인된다. 은어는 하구(河口) 가까운 바다에서 월동한 치어가 4월경 하천으로 올라와 상류 쪽에서 성장하고, 9월경 다시 하구 쪽으로 내려가 산란을 하게 된다. 돌 자갈 덮인 여울진 곳에 1만개 내외의 알을 낳으며, 산란 후 어미는 모두 죽는다. 이 때 은어의 죽음을 기다리는 갈매기떼거지의 모습이 또한 장관을 이룬다나? 산란된 알은 통상 14〜20일 걸려 부화되고, 부화된 치어는 바다로 내려가 따뜻한 곳에서 겨울을 지낸다. 봄이 되면 7㎝ 내외의 은어가 되어 다시 상류로 올라와 성장하는 1년생 어류이다. 은어의 역류[遡上]속도는 1일 1~2㎞ 정도이므로 옛날 어르신들은 소상(遡上)시기에 ‘통살’로 생포해 상류에다 방류하고, 늦게 올라오는 놈을 중류에서 포획했다고 한다.

은어는 고유 영역을 고집하는 습성을 지니기에 개체수가 초과되면 성질 급한 그것이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단다. 바다에서 먼저 올라와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은어는 뒤에 도달한 동료와 치열한 영역 경쟁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인위적인 개체수 조정(포획)이 필요할 때도 있다고 한다. 이런 영리한 은어 포획 작전에는 고도의 전략이 필요하다. 성장 은어는 깨끗한 물이끼가 주식이므로 동물성 미끼 등이 통할 리 없고, 험한 여울을 튀어 오르는 월등한 체력을 바탕으로 반두와 반두 사이를 훌쩍 뛰어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의 습성을 잘 연구해 두어야 한다. 은어는 성질이 까칠하여 여울진 곳에 자신만의 영역을 설정하여 거주한다. 영역 안으로 다른 침입자가 들어오면 즉각 격퇴시키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 습성을 이용한 은어 낚시법은 특이하다. 즉, 낚싯줄에 씨은어를 코걸이 하여 묶고, 그 근처에 여러 개의 낚시를 달아서 물속을 끌고 다니면 그곳 먹자리 영역을 지키고 있던 텃세 은어가 외부 침입자를 몰아내기 위해 재빠르게 공격한다. 그러는 사이 낚시에 찔려 올라오게 하는 고도의 전술이다.

일본에서는 ‘도모쯔리(ともづり)’라고 하는데, 도모(とも, 友)는 친구, 쯔리(づり, 釣)는 낚시라는 뜻이니 그대로라면 ‘친구로 낚는다’는 말인데, <친구낚시>라고 하기는 표현이 좀 그렇고, 은어 <놀림낚시> 정도로 해 두자. 하여간 미끼를 달아 배고픈 물고기를 유혹하는 그런 낚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낚시라고 봐야한다. 그러니까 아가미가 걸리는 게 아니라 배나 등이 찔려 나오곤 한다.

은어잡기체험장에서도 사람들의 스크럼을 뚫고 반두와 반두 사이를 유연하게 뛰어 넘는 은어 특유의 곡예 때문에 쫓고 쫓기는 스릴과 서스펜스의 경연장이 되어 오히려 축제의 맛을 더하게 되는 것이다. 매년 7월 말쯤이면 봉화, 영덕, 전남 강진 등에서 은어축제가 개최된다. 특히, 봉화은어축제는 지난해까지 4년 연속 문화체육관광부 우수축제로 선정되면서 우리나라 대표 여름축제가 되었다. 이처럼 은어축제가 성공을 거두면서 주인공 은어는 이제 국민 물고기가 됐지만, 조선말기까지만 해도 은어는 서식지 백성들에게 고통이었다. 진상품 마련 때문이다.

향긋한 수박향이 일품인 고급어종 은어는 맛이 좋아 일찍부터 왕실 진상품(進上品)이 되어왔다. 조선 초 영주군수 김수온(金守溫)은 “은어 한 마리 값어치가 천금인데/ 정녕코 향기로운 물고기라 임금님께 바칠만하다”고 낭만적으로 노래했지만 백성들에게는 양곡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가혹한 세금뭉텅이였다. 또한 귀족어류로 분류된 만큼 냇가도 일반 백성들은 구경도 못하도록 관청에서 관리했다고 한다. 특산물로 지정되면 잡히던, 잡히지 않던 해마다 정해진 양을 구해 보내야 했다. 백성들은 쌀가마니를 매고 하동, 진주에까지 가서 구해 와야 했다. 어떤 때는 은어 두세 마리의 값이 500전이나 했다 한다. 보통 은어 값의 100배 이상이었다. 관청의 수령도 이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은어를 제 때 진상하지 못해 지방 수령 9명이 동시에 탄핵이 된 때도 있었다 한다. 또한, 잡은 은어도 신선도를 유지할 방법이 변변치 않았다. 그래서 석빙고를 만들어야 했다. 예안의 석빙고(보물 제305호, 안동댐으로 이건)도 은어를 저장하는 얼음창고이다. 급히 수송을 해야지만, 300~400㎞나 되는 한양까지의 수송 작전은 전쟁 이상이었다. 은어 10여 마리만 돼도 반드시 최고 좋은 말에 얼음덩어리까지 실어 몇 배 속도로 달리도록 돼 있다. 이로 인해 말이 쓰러지기도 했단다.

결국 1864년 고종 황제는 생은어 봉납이 크게 민폐가 된다고 판단해, 영구히 봉진하지 않도록 지시하여 진상품에서 제외되었다. 낙동강 상류 봉화에도 내성천을 비롯해 운곡천, 낙동강 상류 등에서 은어가 많이 잡혔었다. 그러나 안동댐 준공 이후부터는 바다로 나가지 못해 댐에서 월동하는 은어가 많아졌다. 댐이 막혀 내수면에 사는 은어를 ‘육봉은어’, 혹은 ‘호산은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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