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수(71, 하망동)

부석사(浮石寺)의 보물(寶物)중에서 본존불(本尊佛)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상을 빼놓을 수 없다. 아미타여래상은 소조(塑造.흙) 불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 되었으며 아름다운 불상이다.(국보 45호)

무량수전(無量壽殿)에서 동향으로 불단을 놓고 그 위에 가부좌를 하고 수인(手印)을 항마촉지로 하여 나발(喇髮.소라모양의 머리카락)의 머리위엔 육계(肉계.부처님 정수리에 상투처럼 우뚝 솟아 오른 것.)가 큼직하고 풍만한 면상에 정안정시 눈에는 자비와 위엄이 풍긴다.

두꺼운 입술에서 고려불상의 특징이 보이며 두 귀는 길고 목에는 삼도(三道. 깨달음에 이르는 3가지 수행)가 뚜렷하다. 한쪽을 벗은 법의는 전면에 평판을 겹친 것처럼 평행선을 그리며 흘러내렸고 무릎의 옷 무늬는 평행선으로 각각 밖을 향하여 흘러내렸다.

등 뒤에는 목조 광배가 따로 마련되었고 신광(身光) 두광(頭光) 원권(圓圈)으로 구별해 각각 유려한 보상화(寶相花.모란꽃과 연화의 융합)문을 조각했으며 그 안에 두광에는 3체의 화불(化佛)을 신광에 4체의 화불을 부착시켰던 흔적이 있으며 변두리는 불꽃무늬로 싸여 있다.

대좌는 앞면이 폭 2.37m 측면이 2m 높이 1.05m의 토석을 혼용한 수미단(須彌壇. 불상을 모셔놓는 단)의 원형이 남아있고 뒷면에는 주위에 신라 때의 녹유(綠釉)벽돌이 깔려있으나 불상 무릎이하는 뒤에 설치한 목조불단이 가설되어있어 밖에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매우 정교한 수법을 보이는 불상으로 소상(塑像.정제한 점토로 만든 형상)이란 점에서 더욱 소중하다.

왜정 때 일본학자는 이 불상 수인(手印.자기가 직접 쓴 서명이나 문서)을 보고 석가여래상이라고 잘못알고 있었다. 이 불상이 모셔진 본전의 전호가 무량수전인데다가 불단의 배치가 서쪽에 자리하여 동향으로 앉혀있음이 그러하려니와 보처가 없이 독존으로 봉안되었음 등으로 서방정토 극락세계 교주인 무량수불, 즉 아미타여래 불상임이 확실하다.

이 불상의 조성연대에 대해서는 대개 고려시대로 알려져 있으나 근래 우리나라 권위 있는 학자들은 신라시대로 올려보고 있으니 황수영(黃壽永)박사는 창건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봉안되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제하고 고려중기의 조성이라 함은 봉안된 건물인 무량수전의 연대에서 발설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불존의 위치와 방향 그리고 소조라는 재질 또 보존의 장량(丈量)이나 그 양식 등은 모두 신라 창건당조의 것을 가장 충실하게 전하여 왔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원형의 고수(固守)는 한층 나아가 그 불신(佛身)에 있어서 혹시 두부(頭部)와 오른 손등 불신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한다.

창건 이래 여러 차례 재난으로 중수를 했던 사실은 짐작되나 그때마다 이 본존상은 크기와 양식에 있어 근본적인 변형 내지 전혀 새로 조성은 이루어지지 않고 시대에 따라서 중수만이 가해져 왔다고 추정되는데 1916년 무량수전을 해체하고 수리할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1358년(공민왕7)적병에 의한 화재로 두상(頭像)이 분리되어 1376년(우왕2)원응국사(圓應國師)가 개금개조(改金改造)하다.>라는 기록은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김원룡(金元龍)박사는 <한국미술사에서 신라 말까지로 올려볼 수 있다.> 라고 했으며 진홍섭(秦弘燮)교수는 <한국의 불상에서 조성은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라고 하였다.

1723년(경종3)통정(通政) 정상주(鄭尙周)를 비롯한 94명의 정성으로 이 불상이 개금(改金)된 사실이 전하며(무량수전 불상 개금 문) 최근의 개금은 1975년 6월~9월 15일일 주지 영현과 화주(化主) 운영(云榮)등의 정성으로 이루어졌다.

무량수전 아미타여래상은 우리나라의 영원한 국보이다. 다음은 녹유(綠釉)벽돌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바닥은 파랑, 노랑, 빨강, 검정 등 여러 빛깔의 유약(유藥)을 두껍게 입혀서 만든 벽돌로 마치 오색의 유리를 씌운 듯이 아름다운 바닥을 이루고 있었다.

이 녹유 벽돌은 무량수전내부 바닥에만 깔았던 것으로 예상된다. 1916년 부석사를 중수 수리할 때 무량수전을 해체수리하면서 본존(本尊)대좌(臺座) 밑바닥에만 그대로 두고 다른 곳은 여느 벽돌로 바꾸어 깔았다고 한다. (본래는 무량수전의 바닥 전면이 녹유벽돌이 이었으나 수리할 당시는 부분적으로 녹유벽돌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임.)

지금도 본존대좌 아래는 녹유벽돌이 깔려있다고 하는데 가려져서 볼 수가 없다. 녹유벽돌일부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부석사에도 5장 정도를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아미타경(阿彌陀經)에 의하면 극락정토의 땅은 유리로 되어 있어 그지없이 장엄하고 아름답다고 한다.

극락세계의 교주인 아미타불을 모신 무량수전 또한 극락정토라는 관렴에서 그처럼 장엄하고 우미(優美)한 당우에 찬란하고 아름다운 녹유벽돌을 깔았으리라.

녹유벽돌의 크기는 가로와 세로가 14cm의 정방형으로 두께는 7cm이다. 여러 색깔의 유액을 두껍게 발라서 구워내면 광택이 찬란하고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이 녹유벽돌로 신라 사람들의 극락정토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염원과 높은 문화성을 짐작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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