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06] 풍기읍 동부1리 ‘동문마을’

기목진(基木鎭)-기주(基州)-기천(基川)-풍기(豊基)로 변천
마을의 명품, 서울약국·소문난방앗간·황토골인삼불고기

동부1동 동문마을 전경

풍기읍 동부1리 위치
풍기읍 동부1리 동문마을은 풍기로 들어가는 관문인 남원교(南院橋,나만다리)와 운학교(雲鶴橋) 사이 남원천변(南院川邊)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주요 건물은 풍기읍보건지소-서울약국-풍기농협-황토골인삼불고기-삼일아파트-강변숯불-별장빌라 등이다. 지난 달 24일 동문리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권우섭(63) 이장, 김두홍(76) 노인회장, 최성순(60) 부녀회장, 우연수(89)·황갑희(85) 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마을회관 준공식(2014)

역사 속의 풍기, 동문리
삼국사기에 풍기 옛 이름이 기목진(基木鎭)으로 나온다, 기목진의 진(鎭)자는 진압할 진(鎭)자로 진영(鎭營)의 준말이다. 즉 ‘군대가 주둔해 있는 곳’이란 뜻이다. 신라 진흥왕(즉위 540년)이 죽령을 넘어 고구려로 북진할 때 전초기지 진(鎭)을 설치한 곳이 기목진이다. 고려 때는 기주(基州)라 불렀고, 조선 태종 13년(1413) 기천현(基川縣)이 됐다. 1414년 세종대왕의 아들 문종(李珦)의 태(胎)를 은풍 명봉산에 묻었는데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그 보상으로 은풍의 풍(豊)자와 기천의 기(基)자를 따 풍기(豊基郡)라 하고 군(郡)으로 승격됐다.

서석태(74) 풍기향교사무국장은 “우리 사는 동부리는 조선 때 풍기군 동부면(東部面) 동문리(東門里)였다”며 “예전에 풍기읍성 동문 밖에 있다하여 동문리가 됐다. 그 후 왜정(倭政)때 풍기군, 영천군, 순흥군을 영주군으로 통합될 때 풍기면 동부1리가 됐고, 1973년 풍기읍 동부1리, 1980년 영풍군 풍기읍 동부1리, 1995년 영주시 풍기읍 동부1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풍기의 지명유래
풍기의 지명은 기목진(基木鎭), 기주(基州), 기천(基川), 풍기(豊基)로 변천해 왔다. 모두 터 기(基)자가 들어있다. ‘터가 좋다는 뜻’이라고 한다. 기목진일 때는 군부대 수장(首長)이 고을을 다스렸고, 고려 초 기주(基州)일 때는 기주절제아문(基州節制阿門) 현판으로 봐서 요새를 지키는 절제사가 고을을 다스린 것으로 보여 진다. 조선 초(1413년) 전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기천현(基川縣)이 됐다가 1450년 문종의 태(胎)를 묻은 덕에 풍기군으로 승격됐다. 이 때 별호로 영정(永定) 또는 안정(安定)이라고도 했다. 이 무렵 고을 중심지에 관아(官衙)을 짓고 1466년 김숭로 초대군수가 부임했다.

이후 마지막 권병선(1914년) 군수까지 224명의 군수가 풍기고을을 다스렸다. 소수서원을 설립하고 풍기에 인삼을 처음 재배한 주세붕(재임:1541-1545) 군수는 26대 풍기군수다. 풍기의 별호 안정(安定)은 구한말까지 널리 쓰였는데 1908년 풍기 최초로 설립된 풍기초등학교의 이름이 안정사립보통학교였다. 또 지금의 안정면(安定面)은 풍기의 별호 안정(安定)에서 유래하여 안정면이 됐다.

다정한 이웃
이강희 약사

서울약국 이강희 약사
동부1리 경로당을 찾다가 서울약국에 들어가 길을 물었다. 하얀 가운에 까만 머리띠를 한 이강희 약사를 만났다. 올해 연세가 여든이지만 곱고 단정한 모습은 아직도 여고생 같다.

“내가 영주에서 가장 나이 많은 약사로 원로 대접을 받는다”면서 수박화채를 기자에게 권한다.

이 약사는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의대학교 약학과에 다닐 때, 서울로 유학 와 경의대 한의학과에 다니는 풍기 출신 정진탁(현 서울한의원장) 학생을 만난 인연으로 풍기사람이 됐다. 이 약사는 “풍기로 시집 온지 55년(1963년)이 됐다”며 “풍기는 십승지 중 일승지로 가장 안정(安定)적인 고장이요 풍요의 땅”이라고 말했다. 이 마을 윤수명(86) 할머니는 “이 약사님과 오래 같이 살다 보니 좋은 이웃이 됐다”며 “새댁 때 처음 만났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할머니가 됐다”고 말했다. [서울약국:(054)636-2142]

소문난 방앗간
추두호 사장

풍기 소문난방앗간
동부1리 마을회관에 도착했다. 김춘식 노인회총무가 수박을 들고 왔다. 최성순 부녀회장이 수박을 자르고 새댁네들이 다과상을 차렸다. 권우섭 이장이 “오늘 기지떡은 소문난방앗간 추 사장님이 찬조했다”고 소개했다. 취재를 마치고 권 이장과 방앗간에 갔다. “‘소문난방앗간’이라고 누가 이름 지었냐?”고 물었더니 추두호(67) 사장은 “떡은 정성이다. 떡 찌는데 온갖 정성을 다했더니 저절로 ‘소문난방앗간’이 됐다”며 “예전에는 나무 때 떡을 찌는 등 집사람 고생이 참 많았다. 지금은 전기로 찌고, 기계의 발전으로 안전하고 편리해졌다”고 말했다. 김순화(65) 안 사장은 “봄에는 쑥떡, 여름에는 기지떡, 가을이면 송편, 겨울이면 가래떡을 많이 했다. 요즘은 계절에 관계없이 축하떡(돌,축제)이 많다”고 말했다. 32년의 역사를 가진 소문난방앗간은 ‘뿌리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소문난방앗간:(054)636-5037]

황토골 신교선 사장 부부
인삼석갈비

풍기맛집 황토골인삼불고기
황토골! 듣기만 해도 예스럽고 토박이 냄새가 난다. 권우섭 이장은 “우리마을은 문화재는 없지만 문화재에 버금가는 ‘황토골인삼불고기식당’이 있다”며 “식사시간이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고 주말이나 휴일은 자리 잡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그래서 권 이장과 풍기농협 맞은편에 있는 황토골식당에 갔다.

신교선 사장

신교선(55)·김광희(54) 부부 사장을 만났다. 황토골 맛의 비결을 물었더니 신 사장은 “22년, 변함없는 맛”이라고 말했다. 부인께 ‘황토골’의 의미를 여쭈니 김(여) 사장은 “예스러운 분위기와 지역 정서에 맞을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집에 와서 ‘황토골 맛집’을 검색해 보고 깜작 놀랐다. 블로그에 120건, 카페에 60건이 떠올랐다. 황토골에서 나오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석갈비 한 점 입에 물면 ‘아! 이맛이야’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며 “약간 그을음 향이 나는 듯도 하고, 갈비맛과 인삼향이 어우러져 ‘천상의 맛’을 낸다. 또 기본반찬 게장의 맛과 직접 손으로 반죽해 뽑은 냉면은 황토골 특유의 맛”이라고 말한다. [황토골:(054)635-6088]

동문마을 새댁들
동문마을 사람들

동부1리 터줏대감들
권우섭 이장은 오양골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동부1리로 왔다. 청소년기 때부터 새마을운동에 참여했으며, 20여 년간 의용소방대, 주민자치위원, 새마을지도자 등을 역임한 동부1리 터줏대감 중 한사람이다. 봉사의 의미를 여쭈니 권 이장은 “어릴 적 선친께서 띳밭(오현4리) 이장(里長)으로 일하시는 것을 보고 봉사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배웠다”며 “새마을동산을 만들고 연탄나누기 봉사활동 등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성영(70,노인회감사) 씨는 “어릴 적 현대정형외과 앞 사거리쯤에 엄청 큰 아카시아 고목이 있었고, 회관 아래쪽 10여m 지점에 샘(泉)이 있었다”며 “회관 주변에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 지금 큰 건물이 들어선 농협마트, 3.1아파트 등은 모두 과수원이었다”고 말했다.

동부1리 사람들
김두홍(76) 노인회장은 “풍기는 승지의 마을이다. 현실의 이상향(理想鄕)을 표현한 말로 길지(吉地), 명당(明堂), 가거지(可居地) 등의 용어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승지(勝地)”라며 “조선 말부터 6.25 전까지 북한사람들이 십승지를 찾아 풍기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상호 씨

이 마을 김상도 씨는 “마을 안길에는 옛 성(城)의 흔적이 남아 있고 곳곳에 물돌이 발견되는 것으로 봐서 남원천 물길이 여러 번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상호(67) 씨는 “안정 대룡산에서 태어나 7살 때 동부1리로 와서 여기가 고향”이라며 “도로변 뒤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보면 좁은 골목길의 옛정취가 그대로 남아있고, 토담집 흔적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춘식(72) 노인회 총무는 “김두홍 회장님과 권우섭 이장님이 마을을 잘 이끌어 주셔서 마을이 단합하고 어르신들을 잘 모시는 효(孝) 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어릴 적 평양에 살다가 6.25 전 아버지를 따라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왔다는 전농금(87) 할머니는 “당시 평양에선 ‘풍기로 가야 산다’는 소문이 떠돌아 풍기로 오게 됐다”며 “처음 구름밭에 터를 잡은 후 아버지는 글방훈장을 하셨고, 오빠는 직물공장을 운영했다”고 말했다.

금삼례(81) 할머니는 “지금은 참 행복하다”며 “예전 고생하던 생각은 모두 묻어버리고 즐겁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산면 새해가 고향이라는 손은숙(81) 할머니는 “회관이 없으면 못산다”면서 “10원짜리 치고 놀다가 콩나물 무치고 된장 끓여 점심해먹었다”고 했다.

경로당 죄장이신 우연수 할머니는 “마을행사 때마다 우문화, 황태현, 금주옥, 김춘영, 장인자 새댁네들 수고가 많다.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권우섭 이장
김두홍 노인회장
최성순 부녀회장
우연수 할머니
전농금 할머니
황갑희 할머니
손은숙 할머니
금삼례 할머니
서석태 풍기향교사무국장
김춘식노인회총무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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