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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며은빛인생[9] 만수촌 서숙자 할머니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8.06.28 11:24
  • 호수 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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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의 우리 집은 꽤 잘사는 편이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우리 집이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내 눈에 비친 장면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밧줄에 묶여 있는 사람들,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 몇 명은 등에 시뻘건 피가 솟구치는 채로 고꾸라져 있었고, 몇 명은 무릎을 꿇은 채로 눈을 가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정말이지 믿을 수 없게도, 그 곳에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아무리 눈을 가렸다고 해도 분명 아버지였다. 나는 순간 머리가 핑 돌며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아무리 외쳐도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온몸이 벌벌 떨렸다.

마침내 또 다른 총성이 울리고 아버지가 쓰러졌을 때, 어머니는 기절하고 마셨고 나는 그저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가 멍하게 쓰러진 어머니를 바라보며 주저앉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시절은 온 나라가 빨갱이를 잡는다고 눈에 핏발을 세울 때였다. 그 시절에 억울한 사람들이 누명을 쓰고 많이 죽곤 했었다. 나는 그저 아버지가 이승에서의 한 많은 일들을 툭툭 털어버리고 저세상에서만이라도 편히 쉬실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아버지의 별세를 기점으로 가세는 점점 기울었고, 군복무를 마치고 귀향한 삼촌이 우리 집의 땅을 모두 팔아버렸다. 결국 그로 인한 충격으로 어머니는 화병에 걸리셨고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나는 정말이지 그만큼이나 울었는데도 눈물이 계속 나온다는 게 믿겨지지가 않았다.

아직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서 나오지도 못했는데 어머니까지 잃게 된 현실을 도무지 믿고 싶지 않았다. 한순간에 우리 가족은 파탄 나버렸다. 우리는 졸지에 고아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갈 곳 없던 우리 남매는 아버지 장례에 어머니 장례까지 치르게 된 슬픔을 다 털어낼 겨를도 없이 친척들 집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숙모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내 10대의 절반과 20대의 절반 정도를 숙모와 함께 살았다. 이 시절은 지금까지 내 삶에서의 등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에서 최고로 빛이 나고 아름다운 그 나이가 그렇듯, 그 시절의 나는 참 예뻤다.

25살인가 26살쯤 나는 맞선을 봤다. 전라도에서 왔다는 중매인의 소개로 나보다 서너 살 남짓 많은 한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는 전매청에 다니고 있어서 경제적으로 꽤 부유한 사람이었다. 남편은 우리가 살게 될 집을 직접 지었고 나는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참 행복하게 느껴졌고, 그 미래를 위해서 앞으로의 계획을 짜며 설레어했다. 하지만 또다시 힘든 날들이 연속되었다. 남편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가정은 산산조각이 났고 내 희망과 계획해 왔던 모든 행복들이 깨져 버렸다. 나의 미래와 함께 이제야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가족에 대한 꿈이 악몽으로 변했다. 누군가를 원망하며 나에게 찾아온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 사건이 있고나서 몇 년 뒤, 나는 골반이 금이 가서 인공 골반을 끼우는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대수술 이후로 몸의 고통과 함께 이제 더 이상 몸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은 나를 많이 힘들게 했다. 수술에 대한 충격과 지난 결혼 생활에 대한 상처로 우울증이 걸려 몇 년 간을 멍하니 살게 된 것이다.

그 뒤로 나는 병원에 입원해서 간호사가 알려 준대로 조금씩 운동을 하며 규칙적으로 걷고 안전하게 움직이는 요령을 배우면서 건강을 회복해갔다.

더 큰 문제는 정말 믿을 수 없게도 그렇게 조심하고 또 조심했건만 또 다시 다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수술 후 재활치료를 하는 도중 균형을 잃고 넘어지며 골반 부근의 다리가 부러졌다. 다친 정도가 심각해 결국 나는 또다시 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세상은 참 아이러니하다. 수술을 위해 다리에 부분 마취를 하는 도중에 내 정신이 모두 돌아온 것이다.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깨닫게 되었다. 다행히 수술은 아주 성공적으로 끝났고 나는 영주에 있는 요양원에서 재활치료를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계속 건강을 위해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나는 참 순탄치 않은 삶을 산 것 같다. 마음의 고통과 신체의 고통을 안고 살아오면서 느낀 점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이 있다.

건강할 때는 몰랐었지만, 두 다리로 마음껏 걸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내가 이렇게 다리를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되니 주변의 아픈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직접 아픈 사람이 되어보니 아픈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물론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모두 이해하진 못 하지만 힘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말을 해주면 그 따뜻함은 정말 오래가서 그 것을 받은 사람에게 기운을 준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주위의 아픈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해 주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해본다.

정리_영주여고 2학년 이혜경, 이소연

*영주여고 학생들이 2016년부터 3년째 우리고장 어르신들의 삶을 정리하는 ‘자서전쓰기 프로젝트’를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영주시립양로원 ‘만수촌’, 부석면 남대리, 영주시노인복지관 어르신들의 삶을 기록해 두 권의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에 본지는 자서전의 내용을 본래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다시 정리해 싣습니다. <편집자 주>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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