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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정씨 집성촌 이산면 내림1리 ‘수구리(林丘)’우리마을탐방[204]이산면 내림1리 ‘수구리’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8.06.28 10:51
  • 호수 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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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의 8세손 정준이 임진 때 임구(수구리) 정착
이산서원·도림서당 임구에 유치 수많은 선비 배출

수구리 전경
이산서원(수몰전)

이산면 수구리 가는 길
수구리는 이산면 박봉산(璞峰山) 동쪽 능선 끝에 있는 마을이다. 술바우사거리에서 영봉로를 따라 충혼탑-어실-달내삼거리-두월삼거리에 이르면 내림리로 가는 새길 아래쪽에 옛길이 보인다. 수몰로 떠난 집터엔 잡초가 무성하고, 고향을 지키는 사람들은 산 중턱으로 올라가 새집을 지었다. 지난 10일 이 마을 출신 정연흡(전 종친회장, 현 대종회부회장) 선생과 수구리에 갔다. 이날 수구리경로당에서 정연동 이장, 정의숙 노인회장, 최계원 부녀회장, 정탁교 전 이장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들었다.

대동여지도의 봉산

오래된 역사 박봉산(烽山)
삼국사기 영주의 기록 중 가장 오래된 역사는 죽령이다. 아달라왕 5년(158년) 3월에 열린 것으로 기록되었고, 그 다음이 봉산성(烽山城)에 대한 기록이다. 봉산(烽山)은 박봉산의 옛 이름이다.대동여지도에 「영천동쪽 10리 지점에 봉산이 있다. 소백산맥을 경계로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역이다」고 기록했다. 삼국사기에 「奈解尼師今 二十九年秋七月 伊伐? 連珍 與百濟戰 烽山下破之殺獲一千餘級/내해이사금 29년(224년) 가을 7월 이벌찬 연진이 백제와 봉산 하에서 싸워 그들을 격파하고 1천여명을 살육하거나 포획했다」고 기록했다.

수구리 강변 종친회

행정구역의 변천
영주지에 보면 「영주는 삼국 때 고구려의 날이군(捺已郡), 통일신라 때 날령군(捺靈郡), 고려 때 강주(剛州)-순안(順安)-영주(榮州)로 불렀고, 조선 태종13년(1413)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이됐다. 수구리 지역은 조선 중기 무렵 군(郡)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개편할 때 영천군 임지면(林只面) 두월리(斗月里)에 속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산서원지(伊山書院誌,1615)에는 임구동(林丘洞)으로 나오고, 도림서당지(道林書堂誌,1625)에는 임고동(林皐洞)으로 나온다.

조선 말 1896년(고종33) 행정구역 개편 때 경상북도 영천군 임지면 내림리(內林里)가 됐다가1906(고종43)년 정부의 월경지(越境地) 정리 때 임지면 두월리·내림리 등이 봉화군으로 이관됐다. 그 후 1973년 내림리·두월리 주민대표 송병찬(宋秉璨), 금교성(琴敎聲), 김우규(金佑奎) 등의 진정으로 영주군 이산면에 복귀됐다. 

경로당 준공식

지명유래
이산면(伊山面)의 조선 때 이름은 산이면(山伊面)이다. 일제 때 산이면이 이산면으로 개칭됐다. 퇴계 선생이 쓴 ‘이산서원기’에 보면 「그 곳 지명에 따르고 조금 고쳐서 ‘이산서원’이라 명명했다」라고 썼다. 또 조찬한(趙纘韓,1572-1631) 영천군수가 1615년에 쓴 이산서원 이건기에 보면 「1574년 선조 임금께서 특별히 편액을 내리셨다. 서원 이름을 이산(伊山)이라 하였는데 그 마을이 원래 ‘산이(山伊)’이므로 마을 이름을 돌려 ‘이산(伊山)’이라 하였다」라고 적었다.

또 마을 이름이 ‘수구리’가 된 것은 이곳 지명 임구(林丘)에서 유래됐다. 당시 이곳 사람들은 수풀 임(林)자에서 ‘수’자를 따고 언덕 구(丘)자에서 ‘구’자를 따 ‘수구리’라 부르게 됐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수구리(水龜里)라 부를 때도 있었고, 일제 때는 수구리(水口里)로 쓰기도 했다. 내림(內林)이란 지명은 조선말 이곳 선비들이 ‘우거진 숲’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달봉에서 내려다 본 수구리

영일정씨 수구리 입향내력
수구리는 영일정씨 집성촌이다. 정연흡 선생은 “시조 추밀원지주사 정습명(鄭襲明)의 18세손이고,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8세손인 정준(鄭俊,1576-1637) 선조께서 임진왜란 때(1596) 부인(전주이씨)과 단둘이 진주에서 북으로 피난하던 중 이곳에 이르자 산세가 빼어나고 땅이 기름져 이곳 임구(林丘)에 정착하여 입향조가 되셨다”며 “그 후손들이 420년 동안 세거해 왔다”고 말했다. 정연동(62) 이장은 “수구리에서만 오래 세거하면서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여 1970년대까지는 100여 세대 800여명이 살았다”면서 “산업화 때 도시로 많이 나갔고, 수몰 전까지는 40여세대가 살았으나 지금은 20여 세대만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입향조 정준의 묘

조선 때 교육특구 ‘수구리’
옛 수구리에는 조선 때 초·중학교 과정인 도림서당과 대학과정인 이산서원이 있어 요즘으로 치면 교육특구 같은 곳이었다. 1558년 번천(蕃川.현 휴천1동 남간재) 언덕에 이산서원이 설립되었는데 터가 습해 서까래가 썩어 1614년 군(郡)의 동쪽 임구(林丘)로 이건하게 된다. 정연흡 선생은 “이 때가 준(俊) 선조께서 수구리에 정착한지 18년째 되는 해로 이산서원이 임구에 오도록 부지를 제공하고 인력을 지원하는 등 유치(誘致) 내력이 가첩(家牒)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다. 또 소고 선생의 장남 록(록,1542-1632)은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임구에 도림서당을 건립했다. 당시 선오당 이시(李蒔)가 쓴 도림서당 상량문에 보면 「1625년 칠성산(七星山) 아래 임구에 터를 잡아 박록을 중심으로 송상헌(宋常憲), 전이헌(全彛憲) 등이 건물을 짓고 편액을 도림서당(道林書堂)이라 했다」고 적었다. 그 후 1872년 김박장(金박丈)이 갈마동(渴馬洞.두월뒷산)으로 이건하기까지 250년간 도림서당은 수구리에 있었다.

문중을 빛낸 인물들
입향조의 증손 홍엽(洪燁)은 영조 때 용양위부호군·가선대부에 올랐고, 8세손 비기(丕基)는 철종 때 중추부동지사, 9세손 태용(泰鎔)은 고종 때 돈녕부도정, 9세손 태영(台永)은 고종 말 학식과 덕망이 널리 알려져 통정대부 품계가 하사되었다. 광복 이후 정태교(1923生) 대법원총무국장, 정의덕(1927生) 법무부 이사관, 정의연(1925生) 중등교장, 정연채(1929生) 경북도청 서기관, 정연흡(1931生) 초등교장·6.25참전유공회장, 정해교·정연우(然禹)·정필교 초등교장, 정연우(然友) 육군소장, 정의구 법무부 사무관, 정인교 계명대 교수, 정신교 경북대 교수 등 각계각층 지도자가 많이 배출됐다. 정좌교(81) 어르신은 “서원과 서당이 우리마을에 있었고, 서암(西菴,후일 慕恩亭)이 세워지는 등 교육 환경이 좋아지고, 수학(修學)에 힘쓴 결과 과시를 거쳐 관직에 등용된 선조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물길이 빚은 수구리 –정훈교-
물 위에 뜬 연꽃 형국이라/예부터 기와나 돌집은 없고 초가가 많았대요//엄만 젊은 날을 휘돌아 예서 우릴 낳았고요/모래 강변엔 많은 것들이 生을 살아내고 있었어요//모래무지 버들치 물잠자리 휘파람새 검은등할미새 꼬마물떼새 멧새 발자국들이 총총/고요히 강을 만지던 내성천이에요//개나리와 수양버들이 휘적휘적 물빛을 그리곤 했고요/새벽닭 홰치는 소리에 이따금 초승달이 빠지기도 했어요. -후략- *정훈교 시인은 이 마을 정연동 이장의 아들이다.

수구리 사람들

수구리 사람들
기자가 마을에 갔던 날 수구리 사람들은 경로당에 모여 번성했던 옛날을 그리워했다. 정구교(78) 어르신은 “어릴 적 수구리는 전 동민이 한 가족같이 길흉사를 치루고 농사도 함께했고, 명절에는 같이 몰려다니며 제사지내고 며칠동안 세배하러 다녔다”고 말했다. 최계원(54) 부녀회장은 “지금도 조상을 모시는 제사나 문중모임, 벌초 등에 적극적”이라며 “어른을 공경하는 경로행사에는 출향인들까지 적극 동참한다”고 말했다. 정탁교(58) 전 이장은 “정월보름에는 큰골목을 경계로 동서편(청룡황룡)으로 갈라 줄다리기를 했다”면서 “줄이 길고 무거워 장정 10여명이 메고 백사장으로 나갔다”고 말했다. 강신녀(81) 할머니는 “예전에 줄땡기기를 할 때 동편이 이기면 자식을 많이 낳고 서편이 이면 풍년이 든다”하면서 “늘 마을에는 좋은 일만 있기를 기원했다”고 말했다. 권시남(80) 할머니는 “동네가 모두 한 집안이라 할배할매, 아재아지매, 형님조카, 아우동서 간”이라며 “언제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내일같이 돕는다”고 했다. 정든 집을 떠나 새집에서 사는 느낌을 여쭈니, 신상열(79) 할머니는 “시원섭섭하다”고 했고, 윤옥희(67) 부녀회 총무는 “매일 별장에서 사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윤옥희 씨
손명자 씨
김순늠 씨
우귀란 씨

수박 순치다 왔다는 손명자(75) 씨·김순늠(71) 씨·우귀란(70) 씨는 “지금 농촌은 70대가 제일 젊고 일을 많이 한다”며 “수구리의 농업은 수박이 으뜸이고 고추, 생강 순“이라고 말했다.

회관에서 나와 영주로 오는 길에 정연흡 선생과 입향조(俊) 묘소를 찾았다. 정 선생은 “박봉산 인근에 문중 산이 여러 곳에 있다”면서 “입향조 내외분의 묘소는 둘구비(휴천1동) 형제봉 임좌에 있고, 아들 연수(延守) 선조의 묘는 이산면 달내(達川) 간좌(艮坐)에 있다”고 말했다.

정연동 이장
정의숙 노인회장
최계원 부녀회장
정연흡(문중대표) 선생
정탁교 전 이장
정좌교 어르신
정구교 어르신
강신녀 할머니
권시남 할머니
신상열 할머니

 

이원식 시민기자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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