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창수(71, 하망동, 영주문화원 회원)

영주는 유불문화(儒佛文化)가 화려하게 꽃핀 고장이다. 676년(신라문무왕16) 의상대사가 세운 화엄본찰인 부석사(浮石寺)와 조선 최초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영주의 자랑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영주의 국보(國寶)와 보물(寶物)급의 문화재가 외지로 흩어지고 귀중한 문화유적들이 소홀히 취급되거나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모두는 문화유산의 주인이다. 모두 노력해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고 아끼는데 앞장을 서야 한다. 앞으로 ‘류창수의 잊혀진 역사 이야기’를 통해 영주문화를 이해하고 보존하는데 보탬이 되고자 한다. [편집자주]
부석사(浮石寺)는 우리나라의 화엄(華嚴)본찰로 676년(문무왕16)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세운 사찰이다. 이상적인 불국토(佛國土)인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화엄본찰을 신라의 변방(邊方)인 영주에 세운 까닭이 무엇일까?

신라는 오랫동안 전쟁을 치루고 삼국통일을 이룬 국가다. 의상조사는 왕실의 지극한 애호와 존신(尊信)을 받는 고승이다. 의상조사는 고구려의 먼지나 백제의 바람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나 소가 접근할 수 없는 그런 땅을 찾았다. 소백산은 신라의 진산(鎭山)이며 태백산맥의 종맥(終脈)인 봉황산(鳳凰山)밑이 화엄본찰 가람장소로는 더할 나위없는 최적지로 판단되어 부석사를 짓게 되었던 것이다.

부석사는 이와 같은 사연이 깃든 곳이다. 창건 후 의상조사는 이절에서 40일 동안 법회를 열고 화엄의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설법함으로서 이 땅에 화엄종을 정식으로 펼치게 되었다.<*일승(一乘):성불할 수 있는 오직하나의 길. *십지(十地):보살이 수행하는 階位인 52위 가운데 제 41위~50위까지를 말함.>

특히 의상조사의 존호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고 칭하고 의상조사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모두 이절과의 연관 아래서 생겨난 것이다. 

부석사에는 5점의 국보(國寶)와 6점의 보물(寶物)을 간직한 사찰로 우리나라에서 불국사 다음이다. 국보는 석등(17호) 무량수전(18호) 조사당(19호) 소조여래좌상(45호), 조사당벽화(46호)이며 보물은 삼층석탑(249호), 당간지주(255호), 고려목판(735호), 석조석가여래좌상(1636호), 오불회괘불탱(1562호), 석조여래좌상(220호)이다.

1916년(일제강점기)부석사 무량수전을 해체하고 수리를 할 때 대들보 속에서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20여점의 금동불상등 보물들이 나왔는데 현재 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부석사에서 나온 사적초안문(1961년 작성)에 의하면 그때 발견된 유물은 다음과 같다.

△금도약사여래입상(높이 16.7cm) △금동아미타불상(높이 12.5cm) △금동아미타불상(높이 9.8cm) △금동아미타불상(높이 8.5cm) △금동아미타불상(높이 5.8cm) △금동아미타불상(높이 5.5cm) △금동아미타불상(높이 4.8cm) △금동아미타불상(높이 4.8cm) △금동아미타불상(높이 4.2cm) △금동아미타불상(높이 4.2cm) △금동아미타불상(높이 5.8cm) △금동아미타불상(높이 5.8cm) △금동아미타불상(높이 5.8cm) △금동석가여래입상(높이 5.8cm) △동제아미타불좌상(높이 12cm) △목제 동자상(높이 18cm) △동제아미타불좌상(높이 15.2cm, 폭 4.5cm) △동제공양탑(높이 30cm) △동제육륜(六輪)(높이 9cm) 등이다.

이와 같이 귀중한 영주의 보물급 문화유산들이 외지로 나간 채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영주시에도 막대한 예산을 들여 부석사 성보박물관과 소수박물관을 지어 운용하고 있으니 우리 문화재를 찾아와서 전시를 하고 우리지역 문화발전에 기여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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