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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풍기읍성 북문 밖에 있다하여 ‘북문리(北門里)’우리마을탐방[202] 풍기읍 서부1리 ‘북문마을’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8.06.07 17:14
  • 호수 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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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 직물(인견)의 맥을 이어가는 마을 ‘서부1리’   
3대 이어온 풍기인조·30년 뿌리기업 홍삼방앗간

 

서부1리 전경
추억의 굴다리

풍기읍 서부1리의 입지
풍기읍 서부1리는 오거리에서 굴다리방향 도로와 순흥통로 방향 도로 사이에 있다.
오거리에서 굴다리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풍기제일교회가 있다. 예전에 이 교회를 북문교회라 불렀다. 교회 맞은편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보면 빼곡히 모여 사는 집들이 북문마을 원주민들이다. 지난달 27일 서부1리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김동호 이장, 황경화 노인회장, 손영조 부녀회장, 정동섭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북문마을의 유래와 3대째 이어온 풍기직물 이야기를 들었다.      

풍기읍성(운동장 서쪽)

역사 속의 북문마을
풍기는 신라 때 기목진(基木鎭), 고려 때는 기주(基州), 조선 태종 13년(1413) 기천현(基川縣)이 됐다. 1414년 세종대왕의 아들 문종(李珦)의 태를 은풍현 명봉산에 묻었는데, 1450년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 보상으로 은풍의 풍(豊)자와 기천의 기(基)자를 따 풍기군(豊基郡)으로 승격됐다. 조선 영조 무렵(170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서부리 지역은 풍기군 서부면 북문리(北門里)가 됐다. 그 후 1914년 일제(日帝)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풍기군·순흥군·영천군이 영주군으로 통합되면서 영주군풍기면 서부리가 됐다가 1943년 중앙선 철길이 서부리 중심을 통과하면서 서부1,2리로 분리되고 1952년 1-3리로 분리됐다. 1973년 풍기읍 서부1리, 1980년 영풍군 풍기읍 서부1리, 1995년 영주시 풍기읍 서부1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명유래
김동호(64) 이장은 “서부1리는 옛 풍기읍성 북문 밖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북문리라 했다”면서 “조선 때 5거리 지점에 읍성 북문이 있었고, 순흥으로 통하는 북문길이 사람들로 북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말했다. 김대명(67) 노인회 총무는 “어릴 적 제일교회를 ‘북문교회’라 불렀다”며 “옛 풍기군 서부면에는 북문리를 비롯하여 서문리, 고로촌리, 신교리, 구교리, 등구리, 백야동리, 욱금리 등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선대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강신태(75) 전 시의원은 “지금은 풍기읍성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으나 1960대까지 풍기초등교 담장 서북편에 성(城)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면서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임진왜란 때 관아를 지키기 위해 사방으로 성을 쌓고, 동서남북 4문을 두었다. 그래서 북문, 성내, 동문, 서문, 남문 등 지명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말했다.    

서부1리 경로당

풍기의 근대사
서부1리 경로당으로 가는 골목길에 들어서면 1970년대 새마을시대를 사는 것 같다. 리어카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골목에는 시멘트블록 담과 벽이 그대로 남아 있고, 당시 직물공장 건물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골목 밖으로 빠져나오면 인견느낌, 인견하우스, 홍삼방아간 등 가게들이 보인다. 황경화(78) 노인회장은 “풍기는 평안도 황해도 등지 사람들이 1890년경부터 6.25 때까지 십승지를 찾아왔다”면서 “1960년대 풍기인구의 3분의 1이 이북출신이었다. 대부분 정감록파들로 ‘풍기로 가야 산다’는 풍문이 떠돌자 (십승지) 풍기로! 풍기로! 모여들었다. 이때 이들이 들고 온 게 베틀과 인삼이다. 이 베틀로 시작한 직물이 풍기인견의 원조”라고 말했다.    

풍기 직물의 시작
1934년경 이북 평남 덕천지방에서 명주공장을 운영하다가 월남한 사람들 중 일부가 1938년경 풍기 동부동에 40평 정도의 공장 2동을 신축하여 수족기 32대, 족답기 8대로 직조를 시작한 것이 풍기인견의 효시(嚆矢)가 됐다. 6.25 후 이북에서 직물공장을 경영하던 월남민들이 대거 풍기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인 가내공업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때부터 풍기를 대표하는 전통산업으로 자리 잡게 됐다.
김대석(67) 마을총무는 “풍기직물 전성기 때인 1960-70년대에는 의성·원주·강릉·김천 이내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풍기로 몰려와 사람이 버글버글했다”면서 “풍기 인구가 2만 8천명(풍기초 학생수 2천5백명)으로 늘어나니 해장국집, 국수집, 대폿집이 성황을 이뤘다”고 말했다.

풍기인조집(인견하우스)

풍기최초 인견가게
지금 풍기에는 인견백화점 등 화려한 인견매장이 20여 곳 있다. 오늘의 번화한 매장이 있기까지 처음은 초라한 하꼬방(판자집)에서 출발했다.

김정한 사장

이 마을 박광훈 씨는 “풍기에서 처음 인견소매를 시작한 사람은 김정한(67,인견하우스 사장) 씨”라며 “당시는 서울, 부산, 대구 등 도매상에 주로 넘겼는데 김 씨는 생산 일부를 직접 가지고 가서 팔았으며, 인견가게도 제일 먼저 열었다”고 했다. 황경화 회장의 안내로 풍기인조 가게에 가서 김정한 사장을 만났다. 김 사장은 “시댁(媤宅)과 친청 모두 정감록파로 이북에서 풍기로 왔다. 20살 때 사업가(직조, 정미소, 운수업) 집으로 시집갔는데 이밥먹는 부잣집이었지만 식모같이 일만하는 게 억울했던지 첫 아이를 낳은 후 22살 새택이 인견 5-6필을 이고 보따리장사를 시작했다”면서 “1990년대 초 이 자리에 조그마한 가게를 내고 재봉틀로 옷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이 인견가게의 원조다. 지금은 착한 두 며느리와 3대째 원조인견의 집(인견하우스·인견느낌)을 운영하면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054-636-3257]

비로봉 표석 세운 풍기사람들

비로봉 표석을 세운 사람들
소백산 비로봉(毘盧峰)에 오르면 누구나 표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 표석이 언제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알면 기념의 의미가 다를 것이다. “비로봉표석을 세울 때 간사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우리 동네 박광일 씨”라고 황경화 회장이 귀띔해 줬다.

박광일 씨로부터 당시 이야기를 들었다. “1993년 풍기직물조합 김석근(조합장)·김형동(전 조합장)·정남하(고인) 회원 등이 주축이 되어 비로봉표석을 세우기로 했다. 단양 사인암에서 머릿돌(당시 200만원)을 구해오고, 순흥 저수지 공사장에서 받침돌을 구해왔다. 단양과 영주의 화합을 의미했다. 장수석재에서 글씨를 새기는 등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비로봉까지 운반이 문제였다. 육군 대민지원사업으로 신청하여 육군참모총장 승인을 받아 1994년 2월 22일(정월대보름) 경기 이천 육군 301항공대대 시누크헬기가 소백산으로 왔다. 비로봉표석이 죽령에서 비로봉 정상으로 날아올랐다. 국립공원관계자, 소백산경비대대, 풍기직물조합원, 영주·단양 지역민들의 축하 속에 제막식이 열렸다. 헬기 2회 왕복 84드럼 기름값 등 비용 1천만원은 직물조합원 12명이 기부했다. 글씨는 송지향 선생이 썼다”고 말했다.

홍삼 방앗간

40년 뿌리기업 홍삼방앗간
풍기역에서 순흥통로로 가다보면 굴다리사거리 동남쪽에 홍삼방앗간이 있다. 문을 열고 방앗간에 들어서니 진한 홍삼내음이 온몸을 가득 채운다. 30년 뿌리기업인 황경화 회장은 “예전에 발동기 돌리던 때부터 방앗간을 시작하여 30년이 지난 지금 홍삼분말전문기계로 빻는다”며 “전국 각지로부터 약재분말, 홍삼분말 주문을 받아 작업한다. 이 기계는 전국에 몇 집 안 되고, 경북 북부에서 유일한 홍삼전문방앗간”이라고 말했다. [역전홍삼방앗간 054-636-2739]

북문마을 사람들
김동호 이장
황경화 노인회장
손영조 부녀회장
정동섭 새마을지도자
박삼훈 노인회 이사
강신태 전 시의원
유봉남 전 市새마을부녀회장
박광일 노인회 이사
김대명 노인회 총무
김대석 동 총무

서부1리 사람들
김동호 이장은 “서부1리는 농업이 (50%이상) 대부분으로 143세대에 450명이 산다”며 “농업은 인삼, 과수, 벼농사, 약초 등”이라고 말했다.

유봉남(73) 전 市새마을부녀회장은 “서부1리에는 20년 이장경력의 김동호 이장을 비롯하여 강신태 전 시의원, 박광일 전 경북배드민턴협회장, 황경화 전 바르게살기협회장 등 지역 발전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많다”며 “이장님과 노인회장님이 마을 잘 이끌어 화합이 잘 되는 마을”이라고 말했다.

유봉남 전 부녀회장은 마을일은 물론 영주시새마을부녀회장을 8년간 맡으면서 새마을김치나눔축제, 영주소백산마라톤 잔치국수 제공 등 큼직한 사업을 처음 시작한 분이다. 박삼훈(81) 어르신은 “어릴 적 마을의 풍경은 초가집, 돌담, 사립문이 있었고, 골목마다 베틀 돌아가는 소리가 ‘달그닥’‘달그닥’ 났다”고 말했다.

정동섭(59) 새마을지도자는 “서부1리는 마을의 결속력이 농촌마을 같지는 않지만 원주민들끼리는 화합과 친교가 잘 되고 있다”고 말했다. 손영조(61) 부녀회장은 “면지역 같은 마을행사는 없지만 정월대보름날 대동회(회의와 윷놀이), 어르신효도여행(연1회), 경로효친 행사 등이 있다”면서 “행사때마다 이장님과 노인회장님, 새마을지도자님, 부녀회원, 청년회원들의 지원과 봉사가 많다”고 칭찬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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