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달 특집] – 6.25참전용사로 손자와 함께 야구경기에 선 원도종 옹

총 한 자루 맨 채 이북 하늘에서 낙하
살아남은 이등병 목에 걸린 충무무공훈장


제63회 현충일인 6월 6일 서울 구로구 고척 스카이돔에서 넥센 히어로즈와 두산 베어스 경기가 열렸다. 이날 경기에 넥센 히어로즈는 서울지방보훈청과 함께 현충일 기념 시구, 시타 행사를 가졌다. 이 자리에 우리고장에 살고 있는 원도종(87) 옹과 손자 원영선(26)씨가 경기장에 섰다. 

원도종 옹은 1950년 12월 한국전쟁 당시 작전 수행 공로로 충무무공훈장을 받은 국가 유공자다. 손자 영선 씨도 육군 3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는 최전방에서 GP장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지난달 24일 원 옹을 만나 지난 이야기를 들었다.

 

▲군 입대 후 이북으로 가기까지
원 옹의 할아버지는 정감록 제1승지인 풍기 금계동에 터를 잡기 위해 이북에서 내려왔단다. 영주에서 태어난 아버지가 안동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8남매를 낳았다. 8남매 중 7명이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6.25전쟁이 발발했다. 원 옹의 나이 열아홉살 때이다. 

서울 용산중(현 용산고교)을 다니던 원 옹은 7월까지 서울에 있다가 친구 4명과 함께 부모가 있는 안동까지 걸어 내려왔다. 내려오던 중 인민군을 만나기도 했다. 안동에 내려온 원 옹은 부모님과 취학 전 나이의 어린 막내 동생과 함께 영천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대구 팔공산 전투가 한창이던 때였기에 군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기계부대로 갔어요. 그리고 다시 학도병으로 대구에 갔죠. 어느 날 공군에서 와서 군인들을 대상으로 학벌과 신체 등을 점검하고 200명을 차출했어요. 그 속에 내가 있었지요”

커튼이 쳐져있는 버스를 타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이동했단다. 장소도 모른 곳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그리고 인민군 옷을 입고 북에 침투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어느 정도 훈련을 하고 또 다시 버스를 탔다. 대구로 이동해 비행기도 탔다. 원 옹은 대만비행기였던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일본의 군마현 오다시로 이동했다. 그곳은 미공군기지가 있는 곳으로 CIA도 있었단다. 그곳에서 할아버지는 첩보훈련을 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세 끝자락인 한창 추운 12월 말에 원 옹은 김포비행장에 내렸다.

“당시 첩보본부가 서울 안국동에 있었어요. 책임자가 극동지구 책임자인 도널드 니콜라스에게 밤에 찾아갔어요. 거기서 지령을 받았죠. 이후 20명이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 함흥과 흥남 사이에서 낙하산을 메고 내렸어요”

원 옹은 인민군 복장을 하고 작전수행을 위한 총 한 자루만 들고 이북 땅에 섰다. 잠시 창문 밖을 바라보던 원 옹은 ‘죽으러 가는 것과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곳에서 2명만이 살아남았다.

“미국 조종사가 떨어지면 구출하고 작전을 수행하는 등의 임무를 맡았어요. 원산해안을 타고 내려오면서 밥을 훔쳐 먹으며 정보를 수집했지요. 미국전투기가 폭격하기도 하는 상황에서 한 달을 넘게 이북에 있었죠”

▲지금도 떨리는 긴장된 날들
총알이 떨어졌다. 이북에 있는 사람들이 유격대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한 유격대를 찾아갔다. 그러나 유격대장은 원 옹과 동료를 모른다며 총살을 시키려고 했단다.

원 옹은 그 속으로 들어가 남쪽으로 가는 사람들과 함께 산을 탔다. 유격전이 많아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함흥 밑 정평으로 내려왔다. 정보도 수집하고 유격전도 하면서 강원도 원산 가까이 내려왔다. 그러나 정보를 수집해도 전달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던 중 인민군들이 완전히 포위한 상태가 됐다. 그때 이북사람들 2명이 원 옹과 동료를 찾아왔다. 이남으로 탈출하고 싶은데 배를 하나 얻어놨으니 같이 가자고 했단다. 반가운 얘기였다.

새벽이 되기 전에 배를 탔다. 통통하고 소기가 나는 작은 배였다. 선장 한 사람과 가운데는 원 옹과 동료가, 가장자리에는 이북사람 2명이 앉았다. 출발하려니 배를 고정시킨 닻이 걸려 나오지를 않았다.

인민군들이 해안으로 총을 쏘며 오니 이북사람 1명이 12월 추운 바다 속으로 들어가 끌어올렸다. 그러자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인민군들이 쏘는 총알이 얼마나 날아오던지요. 배위에 통이 하나 있었는데 구멍이 얼마나 뚫렸게요. 1km를 가니까 인민군이 조금 더 큰 총을 쏘았어요. 따발총은 따따따 소리가 나지만 그 총은 땅~하고 나와요. 띵~하고 수면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자 멀어져 살았구나 싶었지요”

배에 나중에 탔던 이북사람 2명은 총을 맞고 죽었다. 배를 구한 사람이었단다. 그렇게 강원도 원산 소도까지 나왔다. 작은 배에 추운 날씨까지 힘겨운 시간이었다. 높게 치는 파도로 까딱하면 작은 배가 뒤집혀질 상황이었다. 가다가 미국비행기도 만났다. 시커먼 비행기 두 대가 작은 배가 가니 바로 위까지 내려와 세 번을 돌며 확인하더니 그냥 갔다고 한다. 그렇게 경북 경주시 감포읍에 도착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났다는 안도감이 일었단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 원 옹은 가끔씩 초점을 잃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눈가엔 물기가 들어차고 목소리는 떨렸다.

“서울이 함락됐을 때는 정부가 대구에 있었어요. 생존자 2명으로 대구본부에 들어갔어요. 당시 내 직급은 이등병이었지요. 그 공로로 충무무공훈장을 받은 것이에요. 이 훈장을 받은 사람은 영주지구에는 나 혼자뿐이에요”

원 옹은 헌병대로 이동해 복무하다 1953년 7월 제대했다. 23세였다. 1년여 공부를 하고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영주에서 ‘원치과’를 개업하고 이후 영주시치과협회도 구성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아내 임상순(84)씨는 “할아버지가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3년 전부터 신구약 영어성경을 2번이나 필사했다”며 결과물을 펼쳐 보였다. 영주제일교회 원로장로이기도 한 원 옹은 “한 번을 쓰는데 1년 6개월이 걸렸다”며 “이건 우리집 보물”이라며 소중하게 다뤘다. 그리고는 “옛 삶을 하나하나 얘기하면 하나의 소설이야”라고 읊조렸다. 국가유공자인 원 옹은 6.25 참전 유공자로 충무유공훈장과 12개의 기장을 받았다.

▲서울 삼청동 ‘노부부 키스’ 벽화
원 옹과 손자 영선 씨가 현충일에 고척 스카이돔에서 넥센 히어로즈 시타, 시구자로 경기장에 섰다. 서울지방보훈청과 함께 현충일 기념으로 진행된 것이지만 어떻게 서게 된 일일까?
서울 삼청동에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명물벽화가 있다. 이름하야 ‘노부부 키스’이다.

이 벽화는 손자 영선씨가 2013년 감고당길 벽에 그린 것이다. 노부부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입맞춤하는 그라피티(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린 그림) 작품으로 가로 7m, 세로 2m 정도 크기다. 오른쪽 위에는 ‘위아영(We are young·우리는 젊다)’이라고 쓰여 있다. 그래서 ‘삼청동 위아영 벽화’로 불리고 있다. 이 그림은 유명한 드라마와 CF의 배경이 되면서 널리 알려져 사람들에게 낯설지가 않다.

5년여 세월이 흐르면서 벽화는 비바람에 훼손이 됐다. 이를 본 시민들은 지난해 여름부터 종로구청에 “벽화를 복원해달라”는 민원을 넣었다. 그러나 작가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구청에서는 지난해 9월 소셜 미디어와 블로그를 통해 작가를 찾는 공고문을 올렸고 입소문을 통해 원씨와 연락이 닿았다.

미술을 전공한 적이 없는 원씨는 현재 비무장지대(DMZ)에서 GP(최전방 경계 초소)의 GP장으로 복무 중이다. 위아영 벽화의 영감은 대학교 2학년 때 미국 밴드 펀(Fun)의 ‘위아영(We are young)’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걷다가 조부모님이 떠올랐단다. 평소 서로 아끼고 위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껴 그 모습을 젊은이들이 오가는 삼청동 거리에 남기고 싶었다.
지난 4월 원 중위는 벽의 소유권을 가진 덕성여고에 문의한 후 허가를 받아 그림을 복원시켰다.

“6·25전쟁에 참전하신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으며 군인의 꿈도 키웠어요. 할아버지는 군 생활을 할수록 더 따뜻한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어요. GP에서 북한 땅을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언젠가 북한에서 평화를 주제로 한 벽화를 그리고 싶다는 꿈을요”

원 옹과 손자 영선 씨가 현충일에 고척 스카이돔에서 넥센 히어로즈 시타, 시구자로 경기장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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