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201] 휴천3동 ‘화리미(花林)’

미나라꽝으로 유명했던 도심 속 농촌 마을
지금 영주대장간, 영동교회, 운강사가 있다


 

화림마을 전경
화림 도로표지판

휴천3동 화리미 마을의 위치
화리미는 안동통로 기관차사무소 동쪽 산자락에 있는 마을이다. 
구성로 남산초 사거리에서 남산육교 사거리 방향으로 가다보면 GS칼텍스·영주대장간이 보이는데 그 맞은편에 있는 영동교회 주변과 운강사 아랫마을이 화리미다. 마을 입구 도로명 표지판에 ‘화림(花林)’이라고 쓴 작은 표지판이 달려 있어 옛 지명이 ‘화림’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지난 17일 화리미에 갔다. 이날 화림경로당에서 신진옥 통장, 신시균 노인회부회장, 이면웅 노인회총무, 지옥주 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사람들을 만나 화리미의 유래와 전설을 들었다.

 

영주대장간

영주의 역사와 화리미
영주는 본래 고구려의 날이군(捺已郡), 신라의 날령군(捺靈郡), 고려 때 강주(剛州)-순안(順安)-영주(榮州)로 불렀고,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영주의 옛이름)이 됐다. 화리미는 조선 중기 무렵 군(郡)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영천군 봉향면(奉香面) 광승리(廣升里)에 속한 마을이었다. 화림은 광승마을 아래쪽에 붙은 작은 마을로 독립된 행정구역을 갖지 못하고 늘 광승에 속해있었다. 그 후 조선말 1896년(고종33)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천군 봉향면 휴천동(休川洞)에 속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영주면 휴천리에 편입됐다. 1980년 영주시로 승격하면서 휴천3동 3통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숭례문대장간의 석노기씨

휴천동의 내력
마을 앞을 흐르는 내(川)가 자주 말라붙어 물이 흐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내가 쉬었다 흐른다’하여 쉴 휴(休)자에 시내 계(溪)자를 써 휴계(休溪)라 불렀다.  

조선 문종-단종 때 상장군(上將軍,정3품)을 지낸 단종 절신 전희철(全希哲,1425-1527)이 1457년(세조3)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처가 곳 영천(榮川)으로 낙남(落南)하여 현 휴천동(광승)에 숨어살면서 호를 휴계(休溪)라 했다. 그가 호를 휴계라 한 것은 당시 이곳 지명이 휴계(休溪)였기 때문이다. 휴계는 야성송씨 영주 입향조 눌재(訥齎) 송석충(宋碩忠,1454~1524)의 장인이다. 송석충 또한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 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처가 곳 광승에 은거했다.

지금의 휴천리(休川里)는 조선말(1896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당시 광승리(廣升里)와 지천리(至天里) 일대를 통합하여 휴천리(休川里)라 칭했다.

 

돌고개

 

장방마을

화리미(花林)의 유래 
화리미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1984년에 발간된 경북지명유래 총람에 보면 「고려 때 창건한 화림사(花林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조선의 억불숭유 정책에 따라 조선 초 폐사됐다. 옛 사람들은 ‘화림사’가 있던 곳이라 하여 마을이름을 화림(花林)이라 불렀다」고 기록했다. 또 2010년에 발행된 영주시사에 보면 「예전에 뒷산 골짜기에 복숭아나무가 많아 봄이면 꽃으로 숲을 이루었다 하여 꽃 화(花)자에 수풀 임(林)자를 써 화림(花林)이라 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하기 쉽게 ‘화리미’라 부르게 됐다」라고 썼다.

또 화리미에서 구서원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돌이 많아 ‘돌고개’라 불렀다. 고갯마루 좌측에 있는 마을을 ‘장방골’이라 한다. 장방(將房)이란 예전에 ‘관아의 서리(書吏,수령의 심부름꾼)가 기거하는 방’이란 뜻인데 이 마을에 서리가 살았다 하여 장방골(將房谷)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천마산 운강사
옛 화림사지 인근에 운강사(運降寺)라는 절이 있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40여 년 전 천태종 말사 운강사가 창건됐다”고 한다. 절 마당가에 있는 ‘운강사건립공덕비’에 보면 「상월원각대조사(上月圓覺大組師,구인사창건자)께서 1969년 10월 영주지방 신도들의 불심을 헤아려 천마산 아래 운강사 건립을 발원한 후 1979년 착공하여 1983년 준공했다. 주지 南宮道載, 추진위원장 宋鍾璟, 신도회장 黃聖海」라고 썼다.

운강사 신도들은 “운강사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마가 힘차게 이 땅에 뛰어 내리는 듯하기도 하고, 땅위에서 뛰어놀던 말들이 천마가 되어 하늘나라로 비상하는 듯하기도 하다”며 명당임을 자랑했다.

 

화림경로당

화리미의 자랑 영주대장간
옛 순흥고을에 배순이란 대장장이가 살았는데 퇴계의 제자가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500년 세월이 흐른 지금 한국 제1의 대장장이로 소문난 석노기(65) 장인(匠人)이 화리미에 산다. 충남 논산 노성리에서 태어난 소년 석노기(1954生)는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14살 때 매형이 경영하는 대장간에서 풀무밀기를 시작했다. 몇 년 후 공주에 있는 큰 대장간에서 기술을 익힌 다음 1972년 청년 석노기는 경상도 영주땅에 첫발을 디뎠다.

석 사장은 “현 영동교회 자리에 있던 대장간에서 월급생활을 하다가 22살이 되던 1976년 이 자리에 ‘영주대장간’ 간판을 걸고 자립했다”고 말했다. 그의 사무실에는 향토뿌리기업 인증패, 숭례문대장간 사진, 2011 MBC TV방영 장면, 2014 KBS 굿모닝대한민국 ‘당신이 국가대표입니다’ 방영 사진 등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석 사장은 “2011 숭례문 복원 때 숭례문대장간에서 1년간 전통방식으로 철물을 제작했었다”며 “지금 국가명인 등록을 권유 받았지만 아직 후계자 양성을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그의 곁에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동갑내기 부인 황경숙 씨가 있다. 그는 “아내 내조 덕에 오늘 내가 있다”고 말했다.

화림경로당   
마을 경로당에는 ‘화림경로당’이란 간판이 붙어 있다. “누가 ‘화림경로당’이라고 이름지었냐?”고 여쭈니, 지옥주(82) 할머니께서 “우리 통장님이 지었다”고 말했다.

신진옥(66) 통장께 다시 물었다. 신 통장은 “조부(신웅선)님은 한학자이셨고, 선친(신영조)께서는 1960-70년대 휴천리 이장, 새마을금고 이사장 등을 역임하셔서 지명유래를 잘 알고 계셨다”며 “예전에 광승쪽 산기슭에 ‘화림사’라는 절이 있어 마을 이름이 ‘화림’이 됐다는 이야기 와 조부님께서 1970년대 마을 뒷산에 복숭아나무를 많이 심어 복사꽃이 만발했다는 이야기를 선친께 들었다”고 말했다. 

신시균(82) 노인회부회장은 “화림경로당은 2012년 시(市)에서 부지를 확보하고, 2013년 3월 공사를 완료한 후 5월 8일 준공식 및 화림경로당 현판식 그리고 경로잔치를 열었다”면서 “이해원 노인회장님과 신진옥 통장님이 마을을 잘 이끌어 주셔서 모두가 만족하다”고 말했다.  

 

화림마을 사람들
신진옥 통장
이해원 노인회장
신시균 노인부회장
이면웅 노인회총무
양분녀 할머니
이정자 할머니
지옥주 할머니
정위숙 할머니
강경숙 할머니
박선여 씨

화리미 사람들
영주대장간 맞은편 구서원길로 넘어가는 길새에 화림경로당이 있다. 마을 어르신 20여명이 모여 여러 패로 나누어 화투놀이를 하고 바둑·장기도 둔다.

정위숙(82) 할머니는 “나라에서 하는 일 중 경로당 정책이 으뜸인 것 같다”며 “어르신들이 편히 쉴 수 있고, 대우 받을 수 있게 해 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 마을에 오래 산 박선여(73) 씨는 “화리미는 광승쪽 산비탈에 옛 마을(달동네)이 아직 남아 있고, 코레인아파트, 새마을주택, 슬라브주택, 현대양옥, 연립주택 등 시대별 주택이 골고루 있어 주택박물관 같다”고 말했다. 강경숙(79) 씨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영동교회 주변에 미나리꽝이 여러 군데 있었다”며 “도시 속 농촌풍경이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했다.   

“노인회장님은 안 나오셨냐?”고 여쭈었더니, 이면웅(79) 노인회 총무는 “이해원 노인회장님은 비오는 날이 아니면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왜냐?”고 하니 “농사를 짓기 때문”이라고 했다.

며칠 뒤(18일) 이해원(82) 회장을 만났다. 82세 답지 않게 젊어 보이는 이 회장은 체구가 장군  폼이다. “회룡포에 농장이 있는데 벼농사에 고추, 감자, 마늘 등 골고루 다 한다”고 했다. “농기계도 직접 사용하느냐?”는 질문에 “물론”이라고 했다. “장수(건강)의 비결이 뭐냐?”고 했더니 “편안한 마음과 욕심 없이 사는 것”이라고 했다.

화림경로당에서 좌장이신 양분녀(86) 할머니는 “일제와 6.25를 겪으면서 나무껍질과 쑥으로 연명하던 옛날을 생각하면 지금은 천국에 사는 것 같다”며 “6.25 후 3년간 가뭄으로 융년이 들었을 때가 제일 어려웠다”고 말했다. 이정자(75) 전 총무는 “의식주를 자급자족하던 어릴 적을 생각하면 우째살았는지 신통하다”며 “지금은 나라에서 쌀주지, 기름주지, 에어콘 주지 넘넘 만족하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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