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봉암사 경내에 마련된 서암선사 탑비

아직 저수지가 축조 중이던 봉화 물야 오전저수지 뒤편 언덕으로 초가을 햇볕을 쬐는 서암(西庵) 큰스님의 무위정사(無爲精舍)를 찾은 적이 있었다.

“참 험난한 시절이었지요.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진지 드셨습니까?’하는 우리네 인사말이 생겨나던 때였으니까요.” 하루 밤에 수십 명씩 끌려 나가 죽는 사태가 다반사였고,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다 빼앗기던 식민지 시대의 이야기였다. ‘이 뭣고?’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런 험악한 시절에 부친이 독립운동에까지 가담했으니, 가산은 탕진되고 가족이 풍비박산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 공포와 괴로움 속에서 동냥 글공부를 하던 어린 홍근에게 ‘이 뭣고?’라는 의문은 자연스러운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이 몸뚱이가 뭐 길래 이토록 괴로운 고?’ 하는 그런 이야기였다.

자연인 송홍근(宋鴻根-법명 서암)은 1914년 풍기읍 금계동 임실마을에서 태어난다. 부친 송동식이 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 집안이 몰락해 소백산 화전민촌을 전전하면서 과히 유랑생활을 했다. 피신 다니는 아버지를 잘 만날 수 없었기에 홍근은 주로 어머니와 지냈다. 일여덟살 때 쯤 일제의 감시를 피해 풍기에서 옥녀봉을 넘는 대강면 올산마을로 옮기면서 마을서당, 새로 생긴 대강보통학교, 예천으로 와서는 대창학원 급사로 일하면서 공부했다. 열두서너 살 때쯤 예천읍 뒷산 서악사(西岳寺)에 올랐다가 “지금까지 배우고 들은 것 말고 니 소리 한번 해봐라” 하는 스님의 하문에 말문이 막혔던 자신의 무지를 타파하기 위해 중이 되게 해달라고 졸라 절집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중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라던 스님에게 빌어 3년간 머슴살이를 조건으로 출가를 하락 받았다. ‘이 뭣고?’의 의문이 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금방 도망칠 줄 알았던 아이가 3년 머슴살이를 다 채우고 나니 화산 스님은 그제야 문경 김용사 강원(講院)으로 정식 출가를 시켜주었다.

‘고목에서 꽃이 피고, 수많은 별들이 쏟아지고, 거북이 기어드는’ 태몽으로 세상에 온 송홍근 소년은 그렇게 산문(山門)을 열게 된다. 그리고는 1939년 종비유학생 자격으로 일본대학 전문부 종교과(宗敎科)에 입학을 해보지만,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하는 유학생활이 그리 녹록하지는 않았다. 신문배달, 치과조수, 고물장수, 짐꾼 등으로 학업과 노동을 병행하자니 부자 밥 먹듯 굶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육체는 깊이 병들어갔다.

결국 당시로는 사형선고와 같았던 ‘폐결핵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자진 귀국하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인생을 마지막 봉사할 참으로 각혈을 하면서도 모교인 대창학원 강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1년 동안 가르쳤다. 그렇게 남은 정열을 다 쏟았으나 죽음조차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가면 갈수록 ‘이 뭣고?’ 화두는 점점 더 절실해져 갔다. ‘생사의 근본 도리!’가 물리적일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송홍근 선생은 다시 문경 김용사 선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루 12시간 이상 정진했어요. 약은 입에 대지도 않았지요. 화두에 목숨을 걸고 정진하다보니 어느 결에 각혈도 기침도 없어졌어요. 바위틈에서 한 달도 굶고 두 달도 굶고, 죽기 살기로 공부한 적이 있었지요. 그렇게 정진을 하다 보니 자기도 없어지고 우주도 없어지는데 다만 그 없어진 것을 아는 마음만 남더라고요.”

기적 같이 병마가 사라지면서 금강산 마하연과 신계사 여름 정진, 가을에는 묘향산 백두산 등지를 거쳐 다시 문경 대승사의 천연동굴에서 성철(性徹)스님과 함께 용맹정진 했다. 이듬해, 계룡산 나한굴(羅漢窟)이라는 천연동굴로 들어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살아 나가지 않으리라’는 목숨 건 정진으로 뼈만 앙상했으나, 의식은 오히려 또렷해졌다고 한다.

나중에는 잠도 잊고 먹는 것도 잊은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었다가 30세 전후에 본무생사(本無生死: 본래 삶과 죽음은 없다)라!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한갓 공허한 그림자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남북한 통 털어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전국 각처를 샅샅이 다니는 수행은 계속되었다. 당연히 한 곳에 1~2년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이른바 그는 납의(衲衣) 한 벌만 걸치고 구름처럼 천하를 주유하는 자유인이었던 셈이다. 봉화 소천면 홍제사, 춘양면 각화사에도 스님의 행적이 있다.

또 문경의 원적사를 중창하는가 하면, 봉암사를 전국 2,500사찰 중 유일한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서 한국불교 선풍의 본원지가 되게 했고, 산문을 통제하여 엄격한 수행 기풍을 진작시킴으로서 동방 제일의 수행도량이 되게 하였다. 또한 한국 최고의 선승(禪僧), 한국 불교 출가수행자의 사표, 추상같은 법도로 한국 불교의 성지를 만든 대종사 등 온갖 수식어를 염주처럼 달고 다니는 서암 큰스님이지만, 오히려 감투 같은 것들이 늘 거추장스러웠다.

1975년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으로 성철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하고는 곧 바로 토굴로 돌아갔다. 1993년 종정을 추대 받았을 때도 넉 달 만에 사임하고 다시 토굴로 숨어들었다. 그렇게 숨어든 토굴이 소위 ‘태백산 토굴’로 통하는 초라한 암자 ‘무위정사’이다.

그는 이 조립식 건물에서 무려 7년간 무위자적(無爲自適) 했다. 선방에는 지필묵과 간단한 취사도구와 이부자리가 세간의 전부였다.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사의  보금자리치고는 너무나 초라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생활선(生活禪)을 주창하던 그가 뇌졸중을 앓으며 다시 봉암사 조실로 복귀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스님의 입적 소식이 들려왔다. 2003년 3월 29일 세수 90세의 일기로 그의 토굴 무위정사(無爲精舍)처럼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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