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인생[7] 만수촌 신순선 할머니

 

어머니라는 80년간의 무게
기독교 가문 이어간 것 ‘뿌듯’


나는 1920년 어느 날, 가을이 깊어질 때쯤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작은 마을 도산면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집안은 기독교를 믿는 집안이었다. 현재 비록 이름의 뜻은 모르지만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신순선이라는 좋은 이름을 지어 주셨다.

옛날에는 글자 하나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를 다녀보진 못했지만 예안동부교회를 다니면서 교회의 글인 성경은 읽을 수 있었다.

성경을 통해 조금이라도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때의 그 마음 하나로 지금까지도 하느님을 잊지 않고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 남편과의 짧았던 인연
남편과 나는 중매쟁이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 그 남자를 직접 만나 보니 같은 교회를 다니고 있었던 오빠였다. 우리는 서로 호감을 느껴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결혼을 했는데, 당시 남편의 나이는 19살이었고 나는 16살이었다. 나는 17살의 어린 나이에 첫 아이를 낳게 되었다. 아이를 낳고 난 후, 어머니가 많이 보고 싶었는데 시어머님의 따뜻한 손길을 받으면서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그 후로 나는 아들 3명과 딸 8명을 더 낳았다. 그러나 집에서 아이를 낳아야 했기 때문에 환경이 별로 좋지 않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을 잃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나의 슬픔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남편도 갑자기 이름 모를 병으로 내 곁을 떠나고 말았는데 남편의 나이는 33살이었고, 나는 겨우 30살이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온갖 시집살이를 하며 열심히 지내왔는데 그런 내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나는 어린나이에 과부까지 되어버린 것이다. 정말 눈앞이 깜깜했고 더 이상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다.

▲11남매를 키워낸 모성...그리고 삶의 버팀목
남편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끊임없이 일했고 자식들의 학업에만 모든 신경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되어 많은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일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몸과 마음 모든 것이 지쳐갈 때쯤 나는 한 가지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남편의 동생들 중 공부를 그나마 조금 잘하던 시동생한테 목사 공부를 시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시동생은 서울에 있는 서울성경학교에 가서 목사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는 그토록 기다린 졸업의 기쁨, 목사가 될 기회 또한 누리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로도 집안에 한 명쯤은 목사를 시켜서 기독교를 믿는 집안의 가문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나의 이기적인 욕심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의 첫째 아들인 오주에게 목사를 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오주는 서울로 올라가 서울성경학교를 졸업한 후 신학 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되었다. 그 때 내 감정이 얼마나 기뻤는지 말로는 절대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우리 기독교 가문을 이어 나가는 데 크게 한 몫을 했다는 뿌듯함이 막 넘쳐흘렀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넷째아들 오태가 오토바이를 타고 풍산으로 가던 중에 차에 부딪혀서 숨을 거두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순간적으로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경험을 맛보았다. 

▲딸들에게 사랑 못 준게 아쉬워
꽃다운 나이를 자식들에게 모두 쏟아 부어 버리고 어느덧 97세라는 노년의 나이가 되어 버렸다. 모든 것에는 시간이 약이라고 한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찡하고 아프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선지 내가 늙어선지 그 기억도 차츰 흐릿해지는 것 같다.

수십 년 전 나를 끊임없이 울게 하고 또 웃게 하는 추억들 대신에 지금 훌쩍 자란 내 자식들이 잘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는 추억만이 쌓이고 있다. 요즘 내가 후회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내 딸들이 어렸을 때 사랑을 많이 주지 못한 것, 관심을 많이 못 주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아들을 매우 선호하는 시대라 아들을 낳으면 집에 아주 큰 경사라도 난 듯했지만 반면에 딸을 낳으면 집안 식구들은 나뿐만 아니라 갓난아기에게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때 내가 더 나서서 딸들을 챙겨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지금도 딸들을 보면 항상 챙겨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뿐이다. 남은 여생만큼이라도 딸들에게 잘 해주고 싶다.

앞으로 지내면서 자주는 못 보겠지만 만났을 때 꼭 안아주고 싶다. 나는 이제 내가 살면서 더 바라는 것이 없다. 이 곳 만수촌에서 여기 있는 할머니들과 서로 의지하면서 살면서 주님에게 기도하며 살다가 인생을 마치고 싶다.

구술_ 신순선 할머니

정리_  이정민, 배수빈(영주여고)

청소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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