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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忠節)의 상징 순흥 금성대군신단(錦城大君神壇)우리마을탐방[200회 특집] 순흥면 내죽리 ‘죽촌(竹村)’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8.05.31 13:42
  • 호수 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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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단, 금성대군·이보흠 부사·순절 의사 제단 
성역화추진, 경북기념물에서 ‘국가사적’ 지정 

 

금성단 사람들

순흥면 금성단 가는 길
금성단은 소수서원 입구에서 부석방향 200m 지점 좌측에 있다. 영주에 살면서 소수서원의 명성에 가려 “금성단이 어디지?”라는 사람도 적지 않다. 다른 고장에서 보기 드문 게 영주에 있다고 내세우는 국가사적(國家史蹟)이 바로 ‘금성대군신단’이다. 이에 우리마을탐방 200회 특집으로 금성단이 자리한 역사의 마을 죽촌을 찾아갔다. 지난 4월 5일 금성단 춘향(春享)날부터 지난 20일까지 탐방 기간 동안 송원태 금성단장, 권용학 금성단성역화추진위원장, 서석원 도감, 신현직 도감, 전 금성단장 여러분 그리고 대를 이어 봉직해 온 금성단 사람들을 만나 단(壇)의 내력과 성역화 추진 성과를 들었다.

 

금성대군지위

 

부사이공보흠지위

순흥부 죽촌(竹村)의 역사
금성단이 자리한 죽촌은 지금 행정구역상 순흥면 내죽2리다. 고을의 이름이 급벌산-급산-흥주-순정-흥녕-순흥으로 변천해 오는 동안 ‘죽촌(竹村)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 지역은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 내죽면(內竹面)이 됐다. 순흥지(順興誌)에 보면 ‘순흥도호부 내죽면(內竹面) 중촌리(中村里)’가 현 금성단 주변 마을이고, 원촌(院村)이 소수서원 주변 마을이다. 중촌리는 폐부와 회복의 세월을 지나 조선말(1896년) 경상북도 순흥군 내죽면 죽촌리(竹村里)로 개칭되었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영주군 순흥면 내죽2리에 편입된 뒤 ‘원단촌’이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촌에서 나고 자란 신현직(68) 도감은 “어릴 적 죽촌과 원촌에는 60여 가구가 살았다”면서 “청다리 주변엔 초가집들이 빽빽했고, 청다리 남쪽 50여m 지점에 물레방앗간이 있었다”고 말했다.

 

재실(齋室)

아!- 금성단
단종애사와 관련 금성대군의 슬픈 이야기를 권용학(83) 성역위원장으로부터 들었다.
권 위원장은 “금성단은 충절의 상징인 금성대군과 당시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정축지변으로 희생된 순흥의 순절의사들을 제향하는 제단”이라며 “정축년(1457) 6월 단종복위 거사가 발각되어 단종은 영월에서 죽임을 당하고, 금성대군은 7월 안동으로 압송 후 10월 사사(賜死)됐으며, 이보흠은 박천(博川,평안북도)에 유배됐다가 10월 교살(絞殺)됐다.

이 때 부(府)는 혁파되고 관아와 집들이 불탔으며,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 죽계를 피로 물들게 했다. 226년이 지나서 부가 회복(1683년)된 후 부사 정중창(鄭重昌)이 1693년 처음 단(檀)을 설치하였고, 1719년 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상중하 3단으로 조성했다. 1742년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가 지금의 품(品)자형 제단 설치, 순의비(殉義碑) 세우기, 담장을 두르고 전사청과 재실을 지어 지금 모습을 갖췄다”고 말했다.

 

제의사지위
행초헌례

금성단성역위 발족과 성과
1693년 단이 설치된 후에도 폐허와 한탄의 세월이 없지 않았다. 또 일제 강점기와 6.25 그리고 보릿고개를 넘으면서도 순흥 유림은 제향을 멈추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그 정신이 곧 선비정신”이라 말한다.

세월이 흘러 2005년. 당시 금성단 도감 권용학·최길현 등 순흥 유림이 주측이 되어 결성된 금성단성역화추진위원회(위원장 권용학)는 금성단 국가사적 지정, 잘못 만들어진 위리안치지 이건 재현, 숭모전 건립, 충정 교육관 마련 등을 목표로 출범했다. 이후 학술대회 2회, 공청회 2회, 현장설명회와 40여 차례 회의를 거쳐 2007년 12월 31일 마침내 금성단이 ‘국가사적 제491호’로 승격되면서 그 명칭도 금선대군신단으로 개칭되는 성과를 이뤘다.

권 위원장은 “국가사적 지정이라는 성과를 얻기까지 노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권오걸(고인)·권영창(전 시장) 자문위원님, 문화재청과 교섭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신 장윤석 전 국회의원님, 성역화 부지확보에 남다른 관심을 보내주신 장욱현 시장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순흥 유림의 충의정신과 단합된 힘이었다”고 말했다. 

금성단을 모신 ‘3대독서가’
부석면 도봉에 금성단을 지극히도 숭모해온 ‘3대독서가’ 가문이 있다기에 지난 14일 도봉에 가서 송원태(86) 금성단장을 만나 내력을 여쭈었다.송 단장은 “삼대독서가란 저의 증조 인박(1861生,순흥향장 역임) 할아버지와 그의 아드님 천익(天翼,1878生,소수서원장 역임), 손자 맹선(孟善,1901生)·상선(商善,1906生)·주선(周善) 3대를 이르는 말”이라며 “3대 모두 금성대군의 혼령을 받들고 위로하는 제향(祭享)에 성심을 다하셨다”고 말했다. 3대가 남긴 유고(遺稿) 춘고집(春皐集)과 운강집(雲岡集)을 뒤적이다 옥전(玉田) 권상용(權相用)이 쓴 ‘3대독서가’란 제목의 시가 있어 소개한다. 「有道峯前屋比蝸 擧云三代讀書家(도봉산 앞에 초라한 집이 있는데, 모두들 ‘3대 도서가’라 불렀다)/-중략-(형금은 수백번 갈고 닦아 좋은 그릇을 이루고, 독 속의 옥은 평생 흠을 드러내지 않네)/入眼淸芬餘草樹 滿箱瓊什爛雲霞(눈에 선한 맑은 덕행 초목처럼 여운 남기고, 상자 가득한 문장 구름노을처럼 찬란하네)/-중략-(수壽를 편안히 누려 진실로 유감은 없으나, 선비들이 귀의할 곳 잃으니 어찌하리오? …번역 고현진(안동대 한문학과 석사)」라고 썼다. 송원태 단장은 “부족한 사람이 금성단장 망기(望記,사령장)를 받고 소임에 무게를 느낀다”며 “선대의 유지를 잘 받들고, 전임 송규태·황한문·김숙진·이유항·최길현·송홍준·이우상 단장님께서 이어오신 충의정신과 성역화사업이 잘 마무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
민초신위 제사상

대를 이은 숭모(崇慕)의 길   
20여세 남짓한 때부터 금성단 향례에 참제했다는 송준희(77,도봉 3대독서가 주손) 금성단 감사는 “전통적인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금성단에 출입하게 됐다”며 “1950-60년대 보릿고개를 넘을 때도 금성단 제향은 끊이지 않았다. 당시 금성단 사람들은 바랑을 짊어지고 동냥하듯 곡식을 한 되 두 되 모아 향례를 올렸다”고 말했다.  10여살 어릴 적 할아버지(萬春,1893-1976,금성단장·소수서원장 역임)를 따라 금성단에 왔었다는 이교수(70,우계인) 전 별유사는 “금성단 망기(望記)를 받은 조부께서는 소반에 정수와 망기를 올려놓고 두 번 절한 후 봉투를 열어 보셨다”면서 “제향날 일찍 목욕재계하시고 도탄을 출발하여 보계, 병산을 거쳐 30리 길을 걸어서 다니셨다”고 했다.

순절 65家 제사지낸 대평서당
순흥초등학교 지근 동호마을로 가는 길새에 대평서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퇴계의 9대손 이야순(李野淳,1755-1831)이 1822년 대평서당에 왔다. 마을사람들이 정축년에 희생된 혼백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글을 썼다. 이 글이 권용학 위원장 가문에 전해오고 있어 소개한다. 「아! 정축년 변란에 금성대군과 이보흠부사 그리고 죽계 일대 65家가 죽임을 당하니 천고에 짝이 없는 일로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죽계 곁에 대평서당이 있는데 그 일이 있었던 날의 옛 마을이다. 권씨와 류씨가 서로 더불어 살면서 슬퍼 탄식하면서 의논하여 그들을 위해 각각곡식을 약간 내어서 초하룻날 제수를 준비하여 65家의 혼백을 서당마루에서 위로하니 진실로 어진 군자의 마음 씀이니라」라고 적었다. 여기 나오는 권씨는 안동인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1403-1456)의 후손들이고, 류씨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전주인 류영경(柳永慶,1550-1608)의 후손들이다. 대평서당 사람들은 아마도 금성단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비밀리에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성대군 행적을 적은 글들
금성대군 행적을 적은 전적(典籍) 등에 대해 서석원 도감에게 여쭈었다. 서 도감은 “대군께서 남기신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부(府)가 회복된 후 1693년 단이 설치되고, 1742년 신단비가 세워졌으며, 이상우 순흥부사의 오호시주(嗚呼是州) 현판, 금성대군 시호 청원 때 영의정 조현명이 지은 글 등이 남아 있다”며 “조현명(趙顯命,1690-1752)의 글은 2017년 송홍준 전 금성단장님이 국역(國譯)하여 모든 참제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기자도 한부 받아 꼼꼼히 읽어봤다. 기자가 몰랐던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양도하고 1456년 정월 대궐을 나와 공(公)의 집에 거주했다. 그해 6월 성삼문 등이 죽임을 당했으니 사육신(死六臣)이다. 정축년 공이 순흥에 안치되었을 때 이보흠 부사와 대면하여 함께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공이 화를 당할 때(31살)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 최씨 배속에 아들이 있었으니 맹한(孟漢)이다. 공의 묘소는 전하지 않고, 부인 최씨 묘(淸州巴峴) 곁에 제단을 설치하고 공을 제향했다. 승은정(承恩亭) 기문에 ‘공은 도덕적인 수양과 기량이 맑고 밝았으며, 넓은 도량과 고결한 풍치가 있어 언사(言辭)가 나왔다 하면 한 점의 세속적인 말이 없었다’라고 했다. …이하 줄임」

금성단을 둘러보며
지난 13일 신현직 도감과 금성단과 성역화지역을 둘러봤다. 금성단 재실 마당에 섰다. 신 도감은 “금성단이 오늘의 모습을 갖기까지 전 단장님과 도감님들의 노고가 컸다”며 “특히 권용학 성역위원장님의 눈물겨운 헌신에 경의를 드린다”고 말했다.    

금성단 재실 대청에 걸려 있는 오호시주(嗚呼是州,아! 순흥)는 이상우(李相佑) 부사가 1738년에 쓴 글이다. 단종 복위를 위해 노력했던 인물들의 충의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 글에 보면 「순흥이 다시 부로 회복된 후 1693년(숙종19) 순흥부사 정중창이 마을사람들과 더불어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되었던 유지에 제단을 설치하여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과 그 당시 함께 순절한 사람들을 제사하였다. …이하 줄임」라고 적었다. 1200년 수령 압각수 아래를 지나 과수원길을 빙 돌아왔다. 신 도감은 성역화지역을 가리키며 “성역화 기본방향이 제시한 위리안치지 이건 등 사업이 조속 완성되기를 소망한다”면서 “그간 순흥유림의 노력과 영주시의 지원이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송규태 전 단장
황한문 전 단장
송규태 전 단장
김숙진 전 단장
이유항 전 단장
이유항 전 단장
최길현 전 단장
송홍준 전 단장
이우상 전 단장
송원태 단장
권용학 성역위원장
서중일 성역부위원장
권영표 성역부위원장
이갑선 성역부위원장
서석원 도감,성역사무장
신현직 도감
박국원 감사
송준희 감사
서석영 성역위원
안병우 성역위원
서승원 성역위원
박종섭 성역위원
권오창 성역위원
최세현 성역위원
김태성 성역위원
김선우 성역위원
안병식 성역위원
김계일 성역위원
안유근 성역위원
안덕식 성역위원
서석태 성역위원
권기열 성역위원
서석균 성역위원
이종건 성역위원
류준희 성역위원
이교수 성역위원
이규덕 성역위원
민택기 제유사
김동영 제유사
서화중 별유사
서정박 별유사
정재식 별유사
임재완 별유사
김영균 별유사
정남규 별유사
홍승원 별유사
안준현 별유사

 

이원식 시민기자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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