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오른편으로 문명산이 보이는 구름재마을 전경

문명산(894m)은 청량산 뒤쪽에 자리 잡고 있어 청량산 보다 24m나 더 높지만 청량산의 유명세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은 산이다. 사실은 청량산이 자신을 희생시켜가며 애써 감춰둔 비경이 문명산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문명산은 멀리 태백산, 문수산과 그리고 일월산, 만리산, 청량산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명산이다. 청량산이 대중 앞에 당당히 나서는 산이라면 문명산은 베일에 가려있는 산에 속한다. 이름에 비해서도 턱없이 문명스럽지 않은 산이다. 그러기에 더욱 이 산은 어쩌면 신선(神仙)이 마지막 남겨둔 선계(仙界)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짙게 만든다.

청량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문명산에도 간간히 찾아드는 사람은 있는데, 이들은 산 이름만 보고 성큼 달려든 그런 사람들은 아니다. 오랫동안 별러 여러 차례 탐색을 해 두거나 전문가의 안내를 받지 않으면 선뜻 나서기 쉽지 않은 산이기 때문이다.

그런 문명산 서쪽 자락을 붙잡고 있는 마을이 있었다. 구름도 쉬어간다는 구름재마을이다. 동쪽으로는 옥산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구름재를 운산(雲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니 문명산은 동쪽으로는 옥산마을, 서쪽으로는 운산마을을 어깨로 둔 셈이다.

구름재마을은 지금 마을이라기보다는 그냥 벌판이다. 한때 20여 가구가 살았다지만 지금은 없어진 마을이 됐다. 문명을 찾아 모두들 떠나고 흩어져 자취가 거의 사라졌지만, 흔적을 다 못 지워 남겨진 딱 한집 허름한 농가가 5만여 평의 벌판을 지키면서 옛 마을의 영화를 고집스럽게 증명해 주고 있다.

구름재는 산 아래 본 마을과 3~4㎞ 정도 떨어져 있는데, 말이 3~4㎞이지 높고 험한 산길이어서 잘 걷는 사람도 한 시간 이내로는 닿기가 어려운 곳이다. 마을이름을 ‘운산’이라고도 쓴다지만 사실 ‘구름재’의 어원은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하게 구불구불하게 넘는 재를 일컫는 순수 우리말이라 한다. 그런 이름이 붙여질 정도이니 얼마나 힘들게 올라야 하는지 대충은 짐작이 간다.

그래도 지금은 농사 경운기를 위해 길을 텄다지만 너무 심한 경사길이라 무턱대고 차를 들이댈 수는 없다. 워낙 심한 급경사를 매달리듯 오르다 보면 차가 뒤집히지나 않을까 엔진이 고장 나지나 않을까 두려워 지천으로 핀 야생화 따위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뒤돌아보는 경관이 아찔하기만 하다.

오죽했으면 차량오프로드대회장이 되었을까? 먼 나라 얘기로만 듣던 차량오프로드대회가 이곳에서 열렸다니 신기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가만히 생각해보니 여기 같은 오지가 아니면 어디 가서 그런 오프로드경기장을 꾸밀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곳 구름재의 경사 심한 한계농지를 이용하여 2008년, 2009년 연이어 차량오프로드대회를 개최했고, 야생화원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프로드경기장으로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1170으로 주소가 나와 있다.

구름재 들판 구렁에는 운산정(雲山亭)이라는 현판을 단 정자 하나가 외롭게 햇볕을 쪼이고 있다. 지헌(芝軒) 정사성(鄭士誠)을 모시는 정자라고 한다. 보통의 정자가 학자의 호를 따는데 비해 이 정자는 마을이름을 빌려 왔다. 그처럼 구름재가 강한 인상을 줬다는 뜻일까? 들판 한 귀퉁이에서 보면 마을이 구름 위에 얹혀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낙동강굽이에서 올라오는 시원한 강바람과 산바람을 섞어 마시다 보면 갑자기 신선이 돼버린 자신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구름재마을은 지헌 정사성이 임진왜란 때 태조 영정을 모시고 피란한 곳이다. 안동 태생인 정사성은 퇴계문하에서 수학하고, 1592년 경주의 집경전(集慶殿-태조 영정을 모신 곳) 참봉(參奉)을 제수 받는다. 재임 중 왜란이 일어나 동래, 울산이 함락되자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시고 험산 길을 돌아 천신만고 끝에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이곳 구름재에 은거하였다. 하늘 위에 얹힌 구름재[雲山]이니 인간의 신분으로서는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으리라. 그렇게 어진을 목숨 걸어 봉안한 공로로 그는 양구현감에 제수된다. 그리고 이곳 땅도 함께 하사 받아 동족부락을 꾸미게 된다. 지금도 이곳 땅 5만평이 모두 청주정씨 종중재산으로 등록되어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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