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소백산철쭉제’는 해마다 5월 말경 소백산일대에서 개최된다. 금년은 5월 26(토)~27(일) 양일간이다. 그 행사 속에는 옛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여 옛길을 넘어보는 ‘죽령옛길걷기’ 행사가 있고, 고갯마루에서는 죽령장승제와 함께 죽령길을 개척한 죽죽에 대한 고유제(告由祭)가 치러진다. ‘죽죽제의(竹竹祭儀)’라고 부른다.

죽지령(竹旨嶺-죽령)을 처음 개척한 사람은 죽죽(竹竹)이다. 그는 지금부터 1900여 년 전, 신라초기의 사람으로 <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이사금(왕) 5년(서기 158년) 3월에 비로소 죽지령 길이 열리다”라고 써져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너무 지쳐서 순사(殉死)했고 고갯마루에는 죽죽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최초 죽령길 개척자가 죽죽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개척연대와 개척자가 확실하게 기록된 고갯길은 ‘죽령길’이 유일하단다. 그만한 역사성을 가진 소중한 길이다.

그러나 약 1800여 년 동안이나 관리, 선비, 보부상, 파발마 등등이 넘어 다니면서 애환을 쌓았던 ‘죽령길’이 갑작스런 시대 변화에 떠밀리면서 어느 날 역사 속으로 숨겨졌다. 일제 때의 일이다.

1941년에 중앙선 철길이 뚫리더니 1960년대에는 신작로(新作路) 마저 죽령에 걸쳐지면서 이 길은 다시는 걷지 않는 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는 잊혀 진 길이 되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넘게 ‘죽령길’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아스라이 멀어져갔다.

이 길을 다시 찾아 나선 게 1997년쯤의 일이니 그로부터도 벌써 20년을 훌쩍 넘긴 셈이다. 지역의 한 문화단체가 1991년 단양군과 함께 벌렸던 ‘죽령장승제’가 단초가 되었다. 내친 김에 (사)영주문화연구회는 향토사학자 송지향 선생의 고증을 받아 ‘죽령길’을 다시 찾아내었다. 끊어지고, 덮여진 길을 찾아내는 일이 그리 녹녹한 일이 아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어렵게 길을 찾아내긴 했지만 이미 그 길은 예전의 ‘죽령길’이 아니었다. ‘옛’자가 덧붙여져 있었다. 「죽령옛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옛’자가 무슨 대수랴! 그렇게라도 길을 살려보겠다는 생각으로 ‘죽령옛길걷기’ 행사를 시작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대중 앞에 다시 나타난 「죽령옛길」은 지금 ‘소백산자락길’ 열 두 자락 중 가장 스스럼없는 구간이 되었다. ‘죽령옛길걷기’ 행사도 그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소백산철쭉제’에 맞춰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다. 1846세, 1847세, 1848세….

그로부터 10년 뒤 「죽령옛길」은 또 한 번 전국적인 조명을 받게 된다. 2007년 12월 17일, 문화재청에 의한 <죽령옛길 : 명승 제30호> 지정이 그것이다. 사상 최초의 길 문화재가 된 것이다. 죽죽이 ‘죽령길’을 개척한 이후 정확히 1849년 만의 일이다. 죽죽이 고갯길을 개척한 뒤 너무 지쳐 순사한 이후 첫 번째 수상이 아닐까? 이는 고갯길의 역사적 가치를 국가가 공인해준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연이어 「죽령옛길」은 당시 건설교통부에 의해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올랐고,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해 <전국 7대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되었으며, 2010년에는 <전국생태관광 10모델>로 다시 선정되었고, 2011년 <한국관광의 별>로 등극되는데 큰 역할을 해냈다. 지금도 국립공원관리공단의 <힐링숲길 10선> 등에 연이어 선정되는 등 영광을 이어가고 있다. 이른바 「죽령옛길」마케팅의 성공사례일 것이다.

‘명승 30호 죽령옛길’ 문화재 지정은 희방사역이 있는 무쇠다리마을에서 죽령 고갯마루까지 3㎞ 구간이다. 같은 ‘죽령길’이긴 하지만 죽령너머 용부원길은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했다. ‘용부원’이라는 옛 숙장취락의 뚜렷한 흔적에다 유려한 다자구할머니의 ‘죽령산신당’ 등 걸출한 스토리를 갖추고 있지만, 옛길 개척의지와 그 활용이 미미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단양 사람들은 이점에 대해 지금까지 무릎을 치고 있었다. 그러던 단양군이 급기야 ‘용부원옛길’ 개척에 나섰다고 한다. 금명간 「죽령옛길」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대답이다. 그렇게 하여 양쪽길이 온전히 연결된 「죽령옛길」을 걸어볼 수 있으려나?

죽령(죽지령) 개척자 죽죽은 장군도 화랑도 아닌 평범한 지방 인사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도 그를 죽죽장군, 죽지랑, 죽지장군 등으로 부당하게 진급시키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다.

대야성전투의 죽죽장군, 화랑출신의 죽지장군 등은 모두 죽죽보다 500여년가량이나 후세의 사람들이어서 죽령 개척과는 잘 연결되지 않는다. 다만 죽죽장군은 그 이름에서, 죽지장군은 그의 탄생 설화의 배경이 죽령이어서 약간의 혼돈을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삭주도독사로 명을 받은 술종(述宗)이 도독부(춘천)로 부임하던 길에 죽지령(죽령)을 고르고 있던 좋은 인상의 한 거사와 만났고, 술종 부부가 거사의 꿈을 꾼 날부터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다.

꿈에 거사가 현몽하던 날 그가 사망했으므로 술종은 거사가 자신의 집에 환생한 것으로 생각하여 아이 이름을 죽지(竹旨)라고 지었다. 이 아이가 자라서 죽지랑이라는 화랑이 되었고, 어른이 되어 죽지장군이 되었다. 이 설화 역시 죽령 개척 후 460여년쯤 지난 뒤의 이야기여서 죽령 개척과 쉽게 연결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BC 57년 : 신라 건국
AD 158년 : 죽죽의 죽령 개척
642년 : 죽죽장군의 대야성(합천) 전투
620년 ? 죽지랑 탄생 설화(술종공)
649년 : 죽지장군 백제군 격파(화랑 출신)
935년 : 신라 멸망
<죽령을 개척한 죽죽과 대야성 전투의 죽죽장군은 시대가 500년가량이나 차이가 나는 동명이다>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