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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의 처갓집이 영주였군요”선실본, 문화탐방 ‘퇴계를 찾아서’ 호응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8.05.03 12:02
  • 호수 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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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묘소
이황 퇴실종택

사)선비정신실천운동본부(본부장 서현제)는 지난 12일 선비정신실천지도사 과정이수자를 대상으로 선비문화체험탐방 ‘퇴계를 찾아서’를 진행했다.

시민운동장을 출발한 버스가 사일동네를 지나자 강사인 영주문화연구회 배용호 이사는 “왼쪽 창밖을 보세요. 퇴계의 처가가 있었던 곳입니다. 처가 새초방(新初房, 새신랑방)이 철길 굴다리 밖에 있었는데 1965년 경북선 철도공사로 헐렸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을 낳은 후 산독으로 돌아가신 퇴계의 첫 부인 허씨의 묘는 이산면 신암리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때가 때인지라 버스출발 전에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하던 많은 우리지역 6.13선거 출마자들 중 한사람으로 착각을 일으킨 채영섭씨(양복에 구두)는 “사일을 초곡(草谷), 또는 푸실이라고도 하는데 퇴계 선생이 남긴 시 중 초곡이 등장하는 시가 7편이라 하네요.”라며 ‘이사당환도지영천 병발철행초곡전사(以事當還都至榮川 病發輟行草谷田舍)’ 를 읊는다.

 해석을 하자면 ‘일이 있어 곧 서울로 돌아갈제 영천(榮川)에 이르러 병을 얻어 푸실(草谷) 밭집에서 묵다’라고 한다.

버스는 온혜에 위치한 퇴계가 태어난 곳인 노송정 종택앞에 내려 노송정종택을 구경했다. 일행은 모두 ‘ㅁ’자 가옥의 한가운데 방이 튀어나온 退溪先生胎室(퇴계선생태실)이라고 쓰인 방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퇴계선생태실을 배경으로 부인(이한숙)을 찍던 임근식씨는 “이런 형태의 한옥은 처음 봤다. 이 곳이 7방에서 기(氣)가 모이는 곳이라고 하니 더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남매를 두고 있는데 진작 이 곳을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아내를 보며 웃었다.

노송정종택에서 지척인 퇴계선생의 형님인 온계 이해선생의 살림집인 온계종택은 먼 거리에서 보고 일행은 버스에 올라 계상서당으로 향했다. 계상서당(溪上書堂)은 퇴계종택 건너편 개울건너 산기슭에 붙어있어 일행은 개울 돌다리를 껑충껑충 건너 계상서당 앞에 섰다.

배용호 이사가 “1천원짜리 지폐를 가지고 계신 분은 지폐 뒤편을 보세요.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巨圖)’가 바로 이곳입니다”라고 하자 일행들은 천원 지폐를 꺼내 비교 감상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퇴계종택은 퇴계 후손이 지어 대를 이어 살아오다 후에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라는 정자를 추가했다. 그러나 1907년 왜병의 방화로 종택이 소실돼 지금의 집은 다른 종택을 매입해 이건한 건물이다. 추월한수정도 옛 건물처럼 재건했다. 퇴계종택의 안타까운 역사를 듣고 일행은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으로 향했다. 수련원 입구 퇴계상을 보고 일행 중 한복연구가 엄숙희씨는 “퇴계선생께는 두루마기가 아니라 학창의를 입은 모습을 세웠어야한다”며 안타까워했다.

버스에 오른 일행은 얼마 가지 않아 이육사문학관 가는 길섶에 버스를 세우고 퇴계 묘소가 있는 하계마을 뒷산을 올랐다. 오르는 길에 퇴계선생의 맏며느리 봉화 금씨의 묘가 있다. 일설에는 ‘죽어서도 시아버지를 모시고 싶으니 죽거든 시아버지 발치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다시 100여m쯤 오르면 퇴계 묘소가 나온다. 퇴계 묘소에는 묘표가 특이하다. 묘표와 묘갈을 혼합한 형식으로, 가운데 ‘퇴도만은이공지묘(退陶晩隱李公之墓)’라고 써 있다.

‘도산에 느지막하게 은퇴한 이공의 묘’라는 뜻이다. 그리고 왼쪽에서부터 퇴계선생묘갈명이 시작된다. 고봉 기대승이 쓴 것으로 앞부분에 퇴계 자신이 쓴 비명(碑銘)을 인용하고 퇴계의 삶과 정치역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퇴계는 자신을 아주 낮추어 표현했다.

‘어리석고 병든 몸으로 학문에 뜻을 두어 벼슬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능력이 부족해 벼슬에서 물러나와 은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늦게나마 자연으로 돌아가 삶의 즐거움을 누린다’는 내용이다.

퇴계 묘소에 참배한 일행은 가까운 곳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며 도시락 점심을 먹고 다시 버스에 올라 마지막 일정인 도산서원을 향해 출발했다. 도산서당에서 배용호 이사는 “이 곳은 퇴계선생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방, 부엌, 마루 삼간구성으로 최소규모 주택입니다. 선생의 묘비에도 나타나있듯 한 위대한 성리학자의 검소한 생활을 엿볼 수 있지요.”라고 말했다. 도산서당의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열정)은 퍼내어도 줄지 않고 가뭄에도 줄지 않는다고 전한다.

권기수(여· 풍기)씨는 “퇴계선생이 풍기군수였던 것만 알았지 선생이 처가가 영주라 신혼을 영주서 보냈다는 것도 부인 묘가 이산면에 있다는 것도 오늘 알았다. 많이 배웠다. 다음 문화탐방에도 꼭 불러 달라. 만사제치고 참가하겠다”고 말했다.

안경애 시민기자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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