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전국의 십승지 분포(MBC화면 캡쳐)

‘십승지’란 천지개벽이 일어날 때 재앙을 피할 수 있는 10군데의 땅을 말한다. 조선조 대표적 비결서인 정감록(鄭鑑錄)이나 격암유록(格庵遺錄)에 따르면, “가까운 미래에 엄청난 천재지변이 일어나 인간은 끔찍한 질병과 굶주림, 추위와 더위, 공포에 시달리게 되고 인류는 종말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십승지에 들어가는 사람은 이러한 재앙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하고, 자손이 번성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예언에 불안을 느낀 민중들이 목숨을 걸고 십승지를 찾아다녔다.

십승지의 정확한 위치는 책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십승지를 언급한 책은 <정감록>, <남서고 비결>, <감결>, <징비록> 등 도합 60여종이나 된다고 한다.

이 예언들은 모두 은어(隱語), 파자(破字) 등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이해가 쉽지 않고, 표현 또한 우회적으로 되어 있어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책의 저자 또한 불분명하고 출처 또한 명확하지 않아 혼란스럽다.

더구나 이런 반왕조적 잡서가 나라와 사회질서를 어지럽힌다 하여 금서(禁書)로 분류되어 있었다. 따라서 모두가 인적을 피해서 숨어 베껴 쓴 필사본이다 보니 베끼는 사람에 따라 내용이 누락되거나 변질되어 같은 책이라도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십승지가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라 하여 전쟁, 질병, 기근이 침입할 수 없는 곳에 입지한다는 점은 모든 비결서의 공통이다.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가야산, 지리산 등 명산 일대에 위치하며, 산이 높고 험준하여 외부와 차단되어 있는 오지라는 점 또한 공통이다. 십승지는 보통 외부와 연결되는 통로가 한 곳 밖에 없다.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가 그것인데 대부분 험한 협곡으로 되어 있어 접근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또 산에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어 평온하고, 수원(水源)이 안정되어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험준한 오지이므로 전염병으로부터도 차단되어 있으나, 정치·경제·사회·군사적으로는 별 쓸모가 없는 땅이라 전쟁이 일어나도 군사들의 접근이 거의 없다. 결론적으로 십승지는 발전보다는 피난과 보존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승지와 유사한 개념으로는 이상향(理想鄕)을 들 수 있는데, 인간의 이상향에 대한 관념은 동서양이 다르고, 시대에 따라 달랐으며, 문화속성에 따라 다시 차이가 나지만, 관념적인 이상향에는 불교의 극락, 기독교의 천국, 도교의 무릉도원 등이 있고, 현실의 이상향을 표현한 말로는 길지(吉地), 낙토(樂土), 복지(福地), 명당(明堂) 등의 용어들이 있었는데, 승지(勝地)도 그 중 하나라는 말이다.

『정감록』은 열 곳 승지에 관해, “첫째는 ‘其川車岩金鷄村’(기천 거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골 사이에 있다. 둘째는 ‘花山北去召羅古基奈城縣東太白陽面’(화산북거 소라고기 내성현동 태백양면) 즉, 화산 소령 고기로 청양현에 있는데, 봉화 동쪽 마을로 넘어 들어갔다.

셋째는 보은 속리산 증항 근처로, 난리를 만나 몸을 숨기면 만에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넷째는 운봉 행촌이다. 다섯째는 예천 금당실로 이 땅에는 난의 해가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

여섯째는 공주 계룡산으로 유구 마곡의 두 물골의 둘레가 2백리나 되므로 난을 피할 수 있다.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로 난을 피해 종적을 감출만 하다. 여덟째는 무주 무봉산 동쪽 동방 상동으로 피난 못할 곳이 없다. 아홉째는 부안 호암 아래가 가장 기이하다. 

열째는 합천 가야산 만수봉으로 그 둘레가 2백리나 되어 영원히 몸을 보전할 수 있다. 정선현 상원산 계룡봉 역시 난을 피할 만하다.” 라고 적고 있다.

「남격암 산수 십승 보길지지」에는 감결에서 말한 열 곳 외에도 여러 장소가 더해졌다. 그 지역은 ‘양백지간명당’이라는 태·소백산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풍기와 영주, 서쪽으로 단양과 영춘, 동쪽으로 봉화와 안동이 보신처라고 하였고, 그 외 내포의 비인과 남포, 금오산, 덕유산, 두류산, 조계산, 가야산, 조령, 변산, 월출산, 내장산, 계룡산 등등을 들고 있다.

십승지 중에서 풍기 금계촌은 모든 문헌에 단연 첫 번째로 등장하기에 정감록 신봉하는 민간들의 거주지 정착과 인구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풍기에서도 소백산 아래의 금계동, 욱금동, 삼가동은 승지의 대표적인 장소이다. 풍기로 전입한 사람들의 이주동기 상당부분이 정감록의 영향 때문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풍기에 정착하여 인삼을 재배하거나 소백산 기슭에서 밭농사로 은둔하며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십승지를 필사한 옛 그림지도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으며, 더욱이 선친의 묘비에다 고향 평안도 주소를 명기해 두고 있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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