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다니지 않는 시골마을 행복택시
작은 슈퍼 속 남대리 주민들의 삶들

 

임재월 할머니

부석면 남대리를 가기 위해 면소재지에서 콩박물관 앞을 지나 임곡리로 들어섰다. 구불거리는 도로를 따라 계속 올라가니 포장된 길이 끝나는 지점에 남대리, 영춘 방면 ‘버스운행 불가’라는 팻말이 나온다. 좁아진 도로를 따라 오르다보면 가끔씩 내려오는 차를 마주한다. 산을 걸어 오를 때 잠시 쉬듯, 좁은 도로가에 차를 멈춰 섰다가 다시 오르니 ‘마구령’이라고 쓰인 글자가 보인다. 이제 내리막길이다. 자주 다니던 사람들에게는 잠시, 외지인에게는 조심스럽고 길게 느껴질 내리막을 지나 주막교를 건너 내려가면 잘 닦아놓은 포장도로가 시작된다.

이곳에서 1.4km를 가면 ‘남대슈퍼’가 있다. 그리고 슈퍼 앞에 옛 부석초등학교 남대분교가 자리한다. 지금은 입구에 ‘남대리녹색체험 힐링관’이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다. 2010년 폐교가 된 학교는 교문 너머에는 “한강의 발원지! ‘남대리’에서 멋진 힐링 되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마구령 고개를 오갔던 옛 이야기
남대슈퍼 문을 열고 들어서니 사람이 없다. 다시 나와 옆문을 보니 문 앞에 신발이 놓여 있어 문을 두드리고 살며시 여니 원룸처럼 거실, 주방, 방이 하나로 된 공간에 할머니 두 분이 TV를 보고 계시다 돌아보신다. 가게에 대해 물으니 임재월(83) 할머니가 주인이란다.

할머니는 강원도 조제마을에서 16세에 시집을 왔다고 했다. 찾아보니 현재 영월군 김삿갓면 내리에 있는 마을로 나온다.

“6.25를 겪고 아버지가 16살에 시집을 보냈어요. 여기 살면서 6남2녀를 낳았어요. 여기는 오지마을이라고 소문났지요. 이제는 여기서 계속 살아야지 어디 가겠어요”

할머니는 올해 양력 설 밑에 아픈 큰아들이 자신보다 먼저 하늘로 갔다며 작게 한숨지었다. 남편은 2대 독자로 칠순쯤까지 살아 자녀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딸이 낳은 쌍둥이 손자도 안아보고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2대 독자와 결혼한 며느리가 연달아 아들을 낳으니 시어머니는 여섯 째 아들을 낳을 때는 ‘아이고’ 소리를 냈단다. 그러면서 딸을 좀 낳으라고 하셨다. 그 후로 할머니는 딸 둘을 낳았다. 자손이 귀한 집에 아들도 많이 낳고 딸도 낳으니 시아버지가 엄청 좋아했다고.

 

▲그 옛날 남대리 아이들의 먹거리
슈퍼는 다섯째 아들이 손자들하고 남대리로 들어와서 같이 살면서 시작했다. 초가집 같던 작은 집 한 칸을 다시 지었다. 70세가 다 될 때쯤이다. 처음에는 담배도 팔았지만 오가는 사람이 없어 담배는 팔지 않는다.

“처음에는 가게가 생겼다고 좋아했어요. 종류는 몇 가지 없었지만 학생들이 있으니 아이스크림도 가득 넣어놓고 팔았죠. 학생이 없어지니 그것도 없어요”

옛날에는 가구 수도 많았다. 한집에 아이들이 다섯, 여섯 명씩 돼 아이들이 한 100명 정도 됐단다. 임씨 할머니 집 맞은편에 사는 동갑내기 친구 박정연(83) 할머니도 남대리 주막거리 옆 마을에서 태어나 17살에 이곳에서 결혼해 7남매를 뒀다.

“우리 8남매도 여기서 초등학교를 나왔어요. 애들이 다닐 때만해도 아무것도 없어 군것질은 생각도 못했죠. 그래서 불쌍타 했어요. 지금 아이들은 얼마나 잘 사먹고 못 먹는 것이 없잖아요. 그때는 옷도, 신발도 먹는 것도 좋은 것 못해줘 지금 생각해도 안쓰러워요”

부석면 소재지만 갔다 와도 아이들이 부모들의 손부터 바라봤다. 끈을 매고 물건이 담긴 짐을 짊어지고 온 보따리에는 고등어나 동태 한 손, 귀중한 식량인 쌀과 보리가 들어있었다. 무거운 쌀도 자녀들을 먹여야 하니 어떻게든 소중하게 지고 왔단다. 흔했던 나물보다는 주로 가져온 것은 고기였다. 농사지은 팥과 콩으로 바꾼 것이다.

“쌀을 못 사먹을 때는 칡도 캐 먹고 소나무 속껍질을 칼로 잘라 푹 삶아 물렁해지면 물에 담가놨다가 송진이 빠지면 두들겨 콩을 빻고 보리나 쌀을 한 움큼 넣어 푹 끓이면 좀 질어져요. 그것을 먹으면 조금 든든해져 일해요. 나물만 삶으면 금방 배가 꺼져 힘이 없었죠”

칡도 캐서 두드려 소금 넣고 넓적하게 쪄서 주면 아이들은 잘 먹었단다. 간식이 없으니 학교 다녀와서 그것이 있으면 좋다고 흔들며 먹었다고.

할머니의 자녀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부석중학교 인근에서 자취를 했다. 평일에는 농사를 짓느라 나갈 수가 없어 할머니는 토요일에 자취방을 간다. 쌀도 사놓고 국수도 삶아주고 일요일 아침에 집으로 올라치면 자녀들의 표정에 힘이 없단다. 엄마가 있느니 편하고 좋았다면서...

“둘, 셋이서 자취하고 고등학교는 영주에서 다녔는데 옥수수 등을 한말씩 짊어지고 부석 장에  가서 팔고 반찬을 사서 버스를 타고 영주로 가요. 그러면 신발, 옷 등을 집에 가져와서 빨고 다시 가져갔죠. 자취하는 집에서 물세 많이 나온다고 싫어 할까봐 힘들게 왔다 갔다 했어요”

 

▲행복택시 타고 병원, 시내 나들이
지금은 참 호강이란다. 버스도 못 들어와 다니기 힘드니 응급환자가 생겨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이장이 시에 요청해 9명이 탈 수 있는 마을봉고차를 지원받았다. 그런데 운전기사가 없어 그것도 힘들어져 지난해부터는 행복택시가 들어온다.

“병원을 갈 때나 볼일 있을 때 부르면 와요. 4명이 탈 수 있어요. 많이 타면 위험하고 더 타면 영주에 못 나가요. 병원에서 치료받고 볼일 다 보고 전화하면 또 실어다 주니 얼마나 좋게요”

자녀들은 할머니에게 용돈을 주면서 먹고 싶은 것 실컷 사먹으라고 한단다. 근데 가까이에 아무것도 없으니 돈이 있어도 못 사먹는다. 산을 넘어가야 뭐라도 먹으니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란다.

“애들이 이것저것 사들고 들어와요. 오늘 아침에도 부석면소재지에서 식당을 하는 아들이 몸에 좋다며 토마토를 가져왔지요. 먹고 싶은 것이 생기면 할머니들하고 병원에 갈 때 택시를 부르거나 나가는 차가 있으면 타고 가서 죽도 사먹고 자장면도 사먹어요. 호호호”

슈퍼에는 주로 술과 음료수를 가져다 놓았다. 길을 지나가던 사람이 어쩌다 음료수나 물을 사가고 배고프다고 라면을 사서 끓여 달라고 하기도 한다. 가게가 허전하니 아들이 산에 가서 캔 약초, 삼 등을 술로 담가 진열해 놨다.

“하루 종일 있어도 사람을 구경할 수가 없어요. 겨울이 되면 더해요. 눈이 오면 산에 넘나들기 더 어려웠지요. 올 겨울에는 춥고 가물어 두 달 동안 물이 나오지 않으니 시에서 먹는 물을 세 번 실어다 줬어요. 옛날에 물을 첨벙이며 놀 때처럼 물이 흘러야는데... 예전에는 시원하게 물에 가서 몸도 씻고 좋았어요”

▲물 한 모금, 허기 달래줄라면
옛날 30~40년 전 남대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가게를 보고 신기해한다. 지금도 할머니의 자녀들은 힘들다며 장사를 말린다. 그래도 그만두기가 쉽지가 않다. 물 한 모금이나 허기를 달래줄 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 중에 조금은 젊은(?) 할머니 한 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을 주민이냐고 물으니 임씨 할머니를 가리키며 “우리 안 닮았소. 동생이요, 동생”이라고 말한다. 임씨 할머니의 동생인 임인뢰(79) 할머니는 남편 직업에 따라 29세에 객지에 나가 태안, 대전, 마산, 울산 등을 10여년씩 돌아다니면서 살았다. 그렇게 살다 2002년에 언니가 사는 남대리에 정착했다. 가게 바로 옆에 집을 짓고 10년 전부터는 황토민박을 하고 있다.

“언니를 보러  하루에 열두 번도 와요. 오늘도 네 번째 왔지요. 어릴 때도 따라다녔는데 시집가면서 헤어졌지요. 이제는 나이가 들며 의지할 곳은 형제뿐이니 공기 좋은 언니가 있는 남대리로 들어왔지요”

힘들어 못한다던 할머니는 동생이 오니 가게를 그만둔다던 마음을 바꿨다. 동생이 “이런 슈퍼라도 있어야 산에 왔다가 목이 마르면 사이다라도 한 잔 들이키고 하지”라고 말하니 할머니가 “하기야 없어지면 사람들이 아쉬워할 것 같네. 하는 데까지 해야지”라고 말한다.

맑은 하늘이 보인 봄날, 날씨가 좋아 남대리 할머니 세분이 남대슈퍼 앞 평상에 나와 잠시 앉아 지나가는 차가 있을까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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