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192] 단산면 옥대2리 ‘원옥대·새마’

파평윤씨 옥대문중 200년 세거한 집성촌
소백산에서 가장 맑은 물이 흐르는 마을

옥대마을 전경

단산면 옥대 가는 길
옥대 마을은 백두대간 고치령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단산면사무소에서 부석방향으로 간다. 단산교회 앞에서 영단로를 따라 200m쯤 올라가서 다시 왼쪽 길로 접어들면 큼직한 돌에 ‘살고 싶은 마을 원옥대·새마’라고 새긴 표석이 보인다. 원옥대교(橋) 건너 산자락에 띄엄띄엄 집들이 보이는 마을이 ‘원옥대’다. 지난 19일 옥대 마을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이해주 이장, 윤대원 새마을지도자, 이창식 씨, 윤주덕 씨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유래와 전설을 듣고 왔다.

입향조가 심은 느티나무
멀리서 본 옥대마을
마을 앞 옥대천

역사 속의 ‘옥대리’
옥대리 지역은 조선조 태종13년(1413) 전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 관할에 속했다. 1700년경 부(府)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나눌 때 옥대는 순흥도호부 일부석면(一浮石面) 지곡리(枝谷里)에 속했다. 당시 지곡리는 현 단산교회와 느티나무가 있는 근처로 추정되며 집이 띄엄띄엄 몇 채 있었다고 한다. 옥대리가 행정구역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은 조선 말 1896년(고종33년) 전국을 8도제에서13도제로 개편할 때다. 

이 때 순흥도호부가 순흥군으로격하되고, 일부석면이 단산면으로 개칭되면서 지곡, 옥대, 금대, 모산을 하나로 묶어 ‘옥대리’라 했다. 그 후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순흥군, 풍기군, 영천군을 영주군으로 통합하고, 순흥군 동원면과 단산면을 통합하여 단산면을 새로 만들었다. 이 때 ‘옥대’는 영주군 단산면 옥대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 이창석(72)씨는 “옥대2리는 원옥대와 새마로 구성됐다”며 “1960년대에는 60여 가구가 사는 큰 마을이었으나 산업화 이후 도시로 떠나고 지금은 옥대에 5가구, 새마에 10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옥대 서낭신(선대이)

지명유래
옥대 마을 뒷산을 멀리서 보면 기차가 가는 것 같기도 하고, 길게 쌓은 자연성(城) 같기도 하다. 예전에 선조들은 ‘뒷산 형상이 임금님의 띠와 같이 곧게 뻗어 나왔다 하여 ‘옥대(玉帶)’라 칭하니 마을이름 또한 옥대가 됐다. ‘옥대’란 지명이 정식 행정구역이 된 것은 1896년(고종33) 행정구역 개편 때 지역 유림이 소수서원에 모여 의논하여 ‘옥대’라 정했다 한다. 윤대원 새마을 지도자는 “예전에는 그냥 ‘옥대’라 불렀는데 옥대리가 1에서 4리까지니까 옥대리의 원조(元祖)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원옥대’라 부른다”며 “옥대는 왕산(王山,해발650m)의 정기를 오롯이 받은 명당 중 명당”이라고 말했다. [왕산:옥대마을 능선 뒤로 보이는 우뚝한 산]

또한 ‘단산’의 지명유래는 「조선 중렵 소수서원 원장을 지내고 영남의 큰 선비로 추앙 받은 질막의 유학자 단곡(丹谷) 곽진(郭瑨,1568-1633) 선생이 살던 마을 단곡에서 단(丹)자를 따고, 대구도호부사를 지내고 소수서원 원장에 추대된 병산의 선비 서현(西峴) 김구정(金九鼎,1559~1638) 선생이 살던 마을 병산(屛山)에서 산(山)자를 따 단산(丹山)이라 정했다」고 한다. 이 또한 지역 유림이 소수서원에서 정했다고 하니 ‘단산’은 선비의 고장에 잘 어울리는 지명이다.

1960년대 구식혼례

파평윤씨 200년 세거지
옥대의 파평윤씨는 사헌부장령·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된 영천부원군 삼산의 아들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 윤당(尹塘, 1422-?)의 후손들이다.

윤당은 세조 때 단종복위(1453)를 도모하다 화를 당하게 됐으나 그 선조가 공신에 있었던 이유로 죽음을 면하고 봉화 닭실(酉谷)에 은거하게 됐다. 윤당은 1남 1녀를 두셨는데 그 딸이 충재 권벌의 어머니다. 그래서 윤당은 외손자 권벌이 대학자로, 정치가로 성장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여 진다.

윤영희 씨

옥대 문중 윤영희(78) 씨는 “윤당 선조의 후손은 닭실에 세거해 오다가 일부는 타지로 옮겨 살았는데 25세 의향(義香,1646-1705) 선조가 닭실에서 안동 도산으로 이거하였고, 의향 선조의 5대손 30세 상하(相夏,1785生) 선조께서 1805년경 이곳으로 옮겨와 옥대 입향조가 되셨다”고 말했다.

윤 씨는 또 “상하 선조께서 옥대에 터 잡으신 후 양거(陽擧,31세)-장규(章圭,32세)-석건(錫建,33세)-효원(孝源34세)·기원(起源,34세)-주국(主國35세)-창희(昌熙,36세)·영희(永熙,36세)로 이어오면서 후손이 크게 번성하여 40여세대가 사는 집성촌을 이루었다”면서 “석건(1869生) 선조는 조선 마지막 문과급제자 욱금의 황헌(1874-1971)과 교유하면서 순흥향교와 소수서원에서 유림을 이끌었으며, 그의 아드님 되시는 기원(1893-1980)선조께서는 소수서원장, 순흥향교향장, 금성단장을 역임하셨다”고 말했다.

전주이씨 옥대 입향 내력
전주이씨 신성군파 10세손인 재직(載稷,1868-1953)·재설(載卨,1871生,성균관유생) 형제는 서울 회현동에 살았는데 당시 시절이 하 수상하여 두 형제는 할아버지(根相)와 아버지(熙應)를 모시고 죽령을 넘어 소백산 깊숙한 곳으로 숨어드니 이때가 1880년대 초였다. 형 재직은 젓돌(회석)에 자리 잡고, 동생 재설은 옥대에 터전을 열었다. 옥대 입향조가 된 재설은 현 옥대2리 이해주 이장의 조부다.

이해주 이장은 “의관이셨던 재직 선조(큰할아버지)는 일제 때 단산면소재지에 한의원(이약국)을 열어 의술을 베푸셨고, 저의 할아버지(재설)는 농업과 유학으로 일생을 보내셨다”며 “당시 서울에서 곧 난리가 난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이곳으로 피난 오게 됐다는 이야기와 당시 순흥, 단산, 부석면에 의원이 딱 한 분 계셨는데 이분이 재직 선조님이셨다는 이야기를 선친으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육석건 유림대표
윤기원 소수서원 원장

옥대 출신 인물들
옥대·새마는 마을은 작지만 예로부터 학문과 교육을 중시하여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됐다. 구한말 윤석건은 지역유림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그의 아들 윤기원은 소수서원 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소학, 중용, 근사록을 강의했다. 현대의 인물로 윤주선(1926生)은 경찰국장에 올랐고, 윤주세는 영주전매서장을 지냈다. 윤주각은 경남도청 서기관, 윤태희는 주택공사 부사장, 윤종섭은 서울대를 나와 변리사 시험에 합격, 유정근은 경북도청 사무관, 안진용은 영주시청 과장, 윤재영(고대졸) 국제변호사, 윤종학(울산)은 박사학위를 받는 등 인물이 많다. 이 마을 윤주덕(67) 씨는 “옥대는 왕산(王山)의 정기를 받아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올 것 이라는 예언이 있었다”며 “지난해 12월 옥대능선길 산책로가 개통되어 왕산과 옥대 1,2,3,4리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옥대마을 사람들
이해주 이장
윤대원 새마을지도자
권옥이 할머니
장태숙 할머니
박재열 할머니
안계화 할머니
이창식 씨
김진호 씨
윤주덕 씨
유재근 씨

옥대2리 사람들
기자가 옥대에 간 날 봄비가 촉촉 내렸다. 마을 어르신들과 청장년들이 회관에 모였다. 이해주 이장님 사모님께서 떡과 부침을 해 와서 잔치분위기가 됐다. 김진호(72) 씨는 “소백산 깊은 골짝에서 발원한 맑고 깨끗한 물이 마을 앞을 흐른다“며 ”어릴 적 친구들과 냇가에서 하루종일 고기 잡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권옥이(87) 할머니는 “이장님과 이장댁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잘 사는 마을’ ‘살고 싶은 마을’을 만들어 줘서 고맙고 감사하다”며 “예전에 기들어가고 기나오는 집에 살면서도 자식들 공부시키는데 온 정성을 다해 이렇게 잘 사는 세상을 맞이하게 됐다”고 말했다.

새마 장태숙(85) 할머니는 “마을 동샘은 물맛이 좋고 양이 풍부해 모두 이 물을 여다 먹고 살았다”며 “해마다 정월보름날이면 동샘을 동신(洞神)으로 모시고 동제를 지낸다”고 말했다. 안계화(81) 할머니는 “옥대마을 서낭신은 선대이끝 산중턱 20여m 지점 돌신(石神,가로30cm 높이 50cm)을 모신다”며 “정월대보름날 제관과 집사, 축관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낸다”고 말했다. 박재열(85) 할머니는 “새댁시절 농사에만 매달려 살 때 자식들 공부 뒷바라지가 부족해 늘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어려운 환경에도 열심히 공부하고 직장 얻어 잘 살고 있는 4남매가 고맙다”고 했다.

이원순 씨

퇴계 선생 직계 후손으로 보계에서 옥대로 출가한 이원순(64) 씨는 “예전에 시조부, 시부모님이 사시던 때는 의식주 자급자족 시대라서 손수 집을 짓고, 농사와 길쌈을 하며 살았다는 이야기를 시어머님께 들었다”며 “당시 사용했던 도구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말했다.

 

 

서춘자 씨

파평윤씨가의 며느리인 서춘자(73) 씨는 “새내(사천1리)가 친정마을”이라며 “당시 고향집 마당에서 구식 혼례를 올리고 트럭을 타고 안찔 장터까지 와서 다시 가마 타고 돌다리 건너 옥대로 갔다”고 했다. 유재근(62) 씨는 “옥대마을은 사과, 포도, 인삼 재배로 소득이 높은 편”이라며 “살고 싶은 옥대·새마로 귀농귀촌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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