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191]이산면 신암2리 ‘머름’

연안김씨 500년 세거지 말바우 마을
온계(퇴계의 형) 선생이 장가 든 두암

머름마을 전경
머름마을 고택
신암2리 경로당

이산면 머름 가는 길
하망동 용암교차로에서 이산면 방향으로 간다. 영주고-이산면사무소-흑석사-이산초 앞을 통과한다. 석포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여 이산보건소 언덕빼기길을 올라간다. 석암교회에서 500m쯤 가면 우금마을이 나타나고, 연결되어 있는 마을이 머름이다. 지난 4일 머름마을에 갔다. 이날 마을 노인회관에서 이우기 이장, 김원영 전 종친회장, 이재식 씨, 조순희 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옛 말바우가 있던 자리

역사 속의 머름마을
영주는 태종13년(1413)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이 됐다. 1650년경 군(郡)의 행정구역을 방리(坊里)로 정비할 때 머름·우금 지역은 영천군 말암리(末巖里) 우금방(友琴坊)이라 부르다가 1750년경 면리(面里)로 개편하면서 말암면 우금리가 됐다.

조선 후기 1896년(고종33)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경상북도 영천군 말암면 우금동이 됐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이산면 신암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우기(68) 이장은 “신암2리는 두암고택이 있는 우금촌과 만취당이 있는 머름마을로 구성돼 있다”며 “머름은 연안김씨·진성이씨 양성이 세거해온 집성촌이다. 1960년대까지는 5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20여 세대 50여명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머름의 지명유래
이 마을 김원영(80) 어르신은 “머름에서 삼봉골 방향 100m 지점 산자락에 말(斗)을 닮은 바위가 있어 말 두(斗)자 바위 암(巖)자 두암(斗巖)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한글 ‘말’자와 바위 ‘암’자를 조합하여 ‘말암’으로 부르다가 발음이 변해 ‘머름’이 됐다”고 말했다.

이 마을 출신 이재식(79,휴천동) 어르신은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마을의 유래도 여러 번 바뀐 것 같다”며 “바위가 끝만 보인다고 말암(末巖), 바위가 말(斗)과 같다하여 두암(斗巖), 바위가 멀리 있다고 원암(遠巖) 등으로 부르다가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을 개편 때 신암(新巖)이 됐다”고 말했다.

연안김씨 종친회
연안김씨 세거지

연안김씨 낙남(落南) 561년
연안김씨는 고려의 사문박사(四門博士) 김섬한(金暹漢)을 시조로 2세 준린(俊麟)이 대장군, 3세 경성(景成)이 판도판서(版圖判書), 4세 우(祐)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내는 등 일찍이 명문 반열에 올랐다. 머름의 연안김씨는 세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문정공(文靖公) 자지(自知,1367-1435,7세)의 아홉째 아들 구(俱,佐軍司正)의 후손들이다.

김종일 연김 종친회장

김종일(73) 종친회장은 “단종복위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구(俱) 선조의 형 잉(仍)의 사위 성삼문이 단종복위를 꾀하다 멸문지화(1456)를 당하자 구(俱) 선조께서는 연루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 소백산 깊숙한 곳에 숨어 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행방이 묘연한 상태가 됐다. 얼마 후 낙남(落南)을 결행한분은 구 선조의 부인이신 인천이씨 할머니다.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아들 세형(世衡)과 여종 하나를 데리고 소백산 남쪽 순흥땅을 찾아와 이곳 두암(斗巖)에 자리 잡으니 이때가 1457년이었다”며 “이와 같이 머름 입향조는 세형 할아버지이시고, 연안김이 머름에 세거한지 올해로 561년이 됐다”고 말했다.

만취당
만취당 김선생 유허비

만취당 김개국
마을 입구에 만취당(晩翠堂)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만취당 김개국(金盖國,1548-1603)이 건립한 정자로 2003년 경북문화재자료 제451호로 지정됐다. 만취당은 김개국의 호이면서 정자 이름이기도 하다. 그의 집 서쪽에 솔(松) 수백그루가 있었다. 설한(雪寒)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곧은 절개를 닮고 싶어 집 편액을 만취당(晩翠堂,늘푸른 소나무)이라 하고 호로 삼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소고 박승임 문하에서 공부하여 1573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9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역민들의 추대로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왜적을 막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해 가을 형·예·공의 3조랑(三曹郞)을 거쳐 강원도사, 충청도사, 옥천군수를 역임했다. 만취당 솔숲 앞에 선생의 유허비가 2016년 3월 제막됐다. 후손들이 성금으로 세운 비다. 김종일 종친회장은 “만취당 묘역 주변을 성역화 중”이라며 “만취당 선조께서 의병대장으로 활약하실 때 이 지역(아랑골)은 군수(軍需) 기지였다. 그래서 만취당 주변과 아랑골 일대를 성역화사업에 포함시켜 나라사랑(愛國) 체험장으로 널리 활용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 마을 김성기(79) 후손은 “만취당 선조께서는 타고난 효성으로 모친상 때는 아침저녁 성묘하셨고, 부친상 때는 삼년을 여묘(廬墓)하셨다”면서 “일생동안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셨던 만취당 선조의 뜻에 따라 차례상이나 제사상은 늘 간소하게 차린다”고 말했다.

온계(퇴계의 형)가 장가든 두암
예안의 명문 진성이씨가 머름에 살게 된 것은 조선 중종(1506-1544) 무렵 온계(溫溪) 이해(李瀣,1496-1550)에서 비롯됐다. 퇴계의 중형인 온계가 18세 되던 해(1514년) 이곳 말바우(斗巖)에 사는 연안김씨 문중의 통례원가인의(通禮院假引儀) 김복흥(金復興,1482-1537)의 딸(만취당의 고모)에 장가들어 처가에서 공부하다 문과급제 후 상경했다.

실제 이곳에 터전을 연 것은 온계의 손자 명(溟,1587-1663,護軍지냄)에 의해서다. 명의 아들 찬한(燦漢,1610-1680)이 진사-문과로 부사에 올랐고, 후손 기동(基東,1798-1863)이 문과에 급제하여 사복시정 역임하는 등 머름에서 과환(科宦)과 문한(文翰)이 대를 이어 나왔다.

후손 이윤교(81) 어르신은 “온계 선조께서 이곳에 장가들어 우거(寓居,잠시 삶)하시다가 벼슬길에 오르셨고, 실제 두암에 터 잡은 분은 1610년경 온계 선조의 손자 명(溟) 할아버지 때부터”라며 “진성이가가 이곳에 세거한지 408년이 됐다”고 말했다.

보진재

보진재(保進齋) 고택

이인기 씨

만취당 동편 지근에 ‘보진재’란 현판이 걸린 고택이 있다. 마침 고택 관리 차 귀향한 이인기(68,서울서대문)씨를 만났다. 이 씨는 “보진재는 저의 증조부(精浩,1834-1907)께서 고조부(周行,호 保進齋,1808-1887)님의 높은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해 당(堂)을 지으시고, ‘보진재’ 편액을 거신지 100년이 다 돼 간다”며 “저의 아버지(炳淳,부산조방사장,2014졸)께서 생전에 ‘보진재를 보수하고 싶다’고 하셔서, 제가 2010-2011(2년간) 1억 6천만원을 들여 전면 보수했다”고 말했다.

이우기 이장
김원영 전 종친회장
안용자 부녀회장
이동현 할머니
김분남 할머니
이윤교 어르신
조순희 할머니
이재식 씨
김성기 씨
김종팔

머름마을 사람들
만취당 푸른솔은 예나 지금이나 푸르름의 상징이다. 만취당 주변의 성역화로 선생의 효충과 의리를 더욱 빛나게 한다. 공원에 차를 세우고 마을을 둘러봤다.

김원영 만취당 후손은 “머름의 연안김가는 좌군사정공파로 단종 때 좌군사정(佐軍司正)을 지낸 구(俱,8세손) 선조님이 파조”라며 “단종복위 참사 등으로 인해 파조(俱)님의 묘(墓) 또한 실전되어 안타까워하던 중 종중의 뜻을 모아 인천이씨 할머니 묘(머름) 옆에 구(俱) 선조님의 단(壇)을 설치하여 추모·제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양 주실에서 머름으로 시집와 연안김문의 며느리가 된 조순희(81,한양조씨,조지훈과 8촌간) 할머니는 “머름의 연김은 훌륭한 조상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다”며 “불천위 제사, 설날 오후 만취당 차례제, 기제사, 10월시제 등 한치의 소홀함이 없다”고 말했다.

퇴계의 직계 후손으로 대구에서 머름으로 시집 온 연김의 며느리 이동현(90) 할머니는 “연김은 퇴계가와 오랜 인연으로 혼인과 교유가 빈번했다”며 “제가 대구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으로 혼인한 것 또한 양가의 깊은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마을 김종팔(76) 씨는 “예전엔 마을이 들판에 있었는데 잦은 수해로 산기슭으로 이거하게 됐다”며 “조선 때는 이곳에 기와집이 많아 ‘신내·머름 반서울’이라 할 만큼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선대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진성이씨 가문의 김분남(88) 할머니는 “새댁시절 시아버님(李唯和)께서 이산면장을 14년 동안(1930-1944) 하시고 퇴임 후 사랑방서당을 열어 후학들을 가르치셨다”며 “교유하시는 선비들이 많고, 찾아오는 후학들이 많아 접빈이 만만찮았다”고 말했다.

안용자(64) 부녀회장은 “머름마을은 일찍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교육을 장려한 결과 각계각층 지도자를 많이 배출했다”며 “부녀자들도 마을부녀회를 비롯한 생활개선회, 농가주부회 등에 활동하면서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전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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