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소, 고구마 팔아 부녀회 공동자금 마련
리어카로 물건 실어오고 가게도 늘려가고

가흥2동 4통은 창진동이나 창진리로 불리며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지역에 있고 안정면과 가깝다. 가흥2동 서부초등학교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안정면 방향으로 가다보면 작은 다리가 나오고 철길을 건너 조금만 가면 두 갈래길 중간에 ‘창진수퍼’가 있다. 이곳은 ‘창진부녀회슈퍼’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잘 닦여진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붉은 간판이 보이지만 40여 년 전에는 비포장도로에 어렵게 서천의 물길을 건너가면 나오던 가게이다.

▲창진어머니회 이야기
“옛날에는 부녀회가 아니고 어머니회라고 불렸지요. 가게를 운영하려고 회원들이 많은 일을 했어요. 참 열심이었어요”

지난 19일 창진경로당에서 ‘창진부녀회슈퍼’를 운영해온 당시 어머니회 양옥자(71), 우정자(77), 안춘자(80), 김분택(72), 안숙희(77) 회원을 만나 40여 년 전의 이야기를 들었다.

“가게를 할 때 회원들이 고생 많았죠. 길도 좋지 않은데 돌아가면서 리어카에 물건을 싣고 와서 팔았어요. 부녀회 공동자금을 마련하려고 이것저것 해서 자금을 계속 불려나갔어요”

회원들은 빈 땅에 채소도 심어 팔고 밥장사도 해서 돈을 조금씩 모았다. 그 돈으로 철길 둑 너머에 있는 논 두마지기를 도지로 받았다. 남에게 맡기기보다 돈을 조금이라도 더 모으려고 회원들이 직접 나서서 모도 심었다. 그 당시 인건비는 5천 원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처럼 긴 장화가 나올 때가 아니라 맨살로 논에 들어갔어요. 다리에 거머리가 많이 달라붙어서 비닐로 다리를 감싸고 해도 잠시뿐이에요. 모를 심는데 뱀이 옆으로 지나가 얼마나 놀랐던지 펄쩍 뛰어 나왔어요”

양옥자 씨의 말에 다른 회원은 뱀보다는 거머리가 더 싫었다고 말한다. 농사짓는 마을어른들은 부녀회의 노력에 벼농사 외에 수확이 많으려면 콩을 심으라고 했다. 그래서 논두렁에 콩도 심어 팔았다. 수입이 괜찮았다.

벼가 익어 베고 거둬들일 때가 생각난다는 회원들은 짚으로 짠 가마를 등에 짊어졌던 이야기를 꺼냈다.

“40kg인데 혼자는 어려워 한명이 엎드리면 양쪽에서 들어 등에 올려 날랐어요. 시내에 있는 농협에서 수매를 해줬는데 창진부녀회에서 왔다고 하면 값을 잘 치러줬어요. 또 고구마도 심었어요. 이 마을이 옛날부터 고구마가 잘 되거든요. 회원들이 시내까지 들고 가서 팔아 기금을 모았지요”

돈이 많이 모이자 회원들은 송아지도 구입했다. 그 송아지를 맡겨 어미 소로 키우고 낳은 송아지는 키워진 사람에게 주고 어미 소는 팔아 목돈을 만들었다. 그렇게 자금을 마련해 가게를 세우고 공동자금으로 물건을 구입했다.

“창진 부녀회 수퍼” 초창기 부녀 회원들

▲자녀처럼 키운 소중한 가게
처음 가게가 있던 자리는 다른 곳이다. 빈 땅에 무성한 풀만 있어 회원들이 풀을 뽑고 땅을 고른 후 가게를 지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회원들이 직접 나서서 모래와 벽돌을 나르고 했지요. 그렇게 방과 정지(부엌) 두 칸을 짓고 나중에 별도로 화장실도 지었어요. 김국희 회장 때부터 공동자금으로 시작한 가게에요”

그때는 30대 전후의 나이로 열정이 가득했던 때였다고 회원들은 말한다. 아이들도 돌보고 집안도 살피면서 열심이었다고. 다들 어렵게 살아도 밥할 때마다 쌀을 한 움큼씩 덜어 모았다가 마을잔치도 하고 부녀회행사도 치뤘단다.

“시어머니께 얼마나 혼났게요. 집안일이나 하지 마을일에 참여한다고 뭐라고 했었지요. 눈치를 많이 봤어요. 그래도 힘든 가운데 서로 의지하고 마음 나누면서 즐겁게 했지요”

회원들은 돌아가면서 가게를 지켰다. 우정자 회원은 그 당시 딸을 임신해 배가 부른 상태로 가게를 봤단다. 그 아이가 세상에 나와 벌써 38세가 됐다.

잘 운영 중이던 가게에 길이 나게 됐다. 시로부터 허물라는 통보를 받고 부녀회원들은 아이들을 업고 가게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그렇게 해서 보상을 받아 컨테이너를 사서 지금의 자리에 가게를 옮겼다.

“고생하며 지켜온 가게도 세월이 지나니 사람들도 적어지고 대형마트도 생겨 어렵게 됐는데 그래도 잘 지켜왔지요. 젊은 주인들이 가게를 계속 유지시키는 것을 보니 좋아요. 가게가 있으니 살아왔던 지난 시간을 추억할 수 있잖아요”

열정적이었던 창진어머니회 회원들은 70~80대로 접어들었다. 회원들 중 6명은 돌아가셨고 2명의 회원은 이날 몸이 좋지 않아 경로당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옛날 고생하던 시절의 사진이라도 미리 찍어놨으면 들여다 볼 텐데 아쉽네요...”

지금은 가게 한쪽에 ‘창진부녀회슈퍼’ 간판이 놓여있다. 부녀회의 사랑방이던 가게는 부녀회원들의 모습들에서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졌다.

김경숙&정명하 부부

▲마음 나누는 사랑방으로

같은 날 오후 3시쯤 가게를 찾았다. 그 옛날 주민들이 막걸리 한잔씩 들이키며 쉰 것처럼, 이날도 한 주민이 작은 테이블에 아무런 안주 없이 막걸리 한 잔을 기울인다.

‘창진부녀회슈퍼’는 지난해 9월경 폐업했다. 현재는 풍기가 고향인 정명하(58)·김경숙(58) 부부가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13세에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살았던 남편 정씨는 5년 전 고향에 정착했다. 오래 동안 건축, 인테리어 관련 일을 해오던 그가 작은 가게를 인수한 것은 아내를 생각한 마음에서다. 식당경험으로 일을 찾던 아내가 청각이 약해 어려움을 겪다보니 찾아낸 것이 가게였단다.

“제 직업은 건축, 인테리어전문이에요. 전국적으로 경기불황인데다 영주는 건축업이 여러 가지로 어려운 점들이 많아요. 타 지역 업체가 들어오고 인건비가 낮은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하는 상황이죠. 이렇다 보니 지금은 가게에서 아내를 돕는 것이 주 업무가 됐네요. 곧 본업을 찾아갈 수 있겠죠”

손으로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뚝딱 해결한다는 정씨는 아내를 위해 가게내부를 물건정리가 쉽도록 만들었다. 가게 내부가 작지만 깔끔하다. 가장 많이 팔리는 담배와 술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물건들이 갖춰져 있다.

이제 반년여 가게를 운영해 오지만 대도시 생활에 익숙한 아내와 딸은 지금도 서울생활을 그리워한다. 활동적인 일을 해오던 정씨도 심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자 얼마 전 가게 안쪽 문에 ‘마음을 다스리는 글’을 찾아 써 놨다.

“수입이 가장 문제가 되겠지요. 그동안 서울에서 벌고 고향에 내려와 쓰기를 반복했어요. 나이가 들어가면서 고향이 그리워져 다시 내려왔는데 안정적으로 정착하기가 힘드네요. 그래도 이번에는 좋은 날들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보려고요”

막거리 한 잔을 비우던 주민은 “이곳은 오가는 사람들이 잠시 머물고 동네사람들이 편하게 쉬는 장소”라며 “주인이 사람이 좋고 선해서 주민들과 어우러져서 오래했으면 좋겠다. 마을사랑방으로 계속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비가 내리는 이날 ‘창진슈퍼’를 향해 걸어 들어오는 사람들이 작은 가게 안을 채웠다.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