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보일러 주민들 위한 ‘번개탄’ 오가는 행인들 머무는 담배 가게로

 

편창호 씨

▲영주 대수해 이후 그리고 귀내보트장서천사거리에서 순흥과 단산 방향으로 갈 때면 시내버스는 구 도로를 따라간다. 철길을 지나 구불구불한 옛길을 가다보면 시민들의 추억의 장소였던 귀내 보트장이 나온다. 귀내보트장을 가기 바로 전 맞은 편에 그냥 흔히 ‘가게’라고 불리는 작은 점빵이 나온다. 그냥 지나칠 법한 장소이다. 다른 가게처럼 간판과 함께 흔히 보이는 ‘담배’라고 쓰인 철판만이 메달려 있다. 그것이 이곳에는 유일하게 가게를 나타내는 흔적이다.

현재 이 가게는 편창호(76)씨가 운영하고 있다. 20년 전 가게를 인수했다는 그는 이전에도 동네주민인 장철환씨, 박용화씨가 하던 것이라고 했다.

“이 곳은 영주에 대수해가 난 이듬해인 1962년 정부지원금으로 지어진 농가주택이에요. 당시에 일반주택이 있고 농가주택이 있었는데 보름골은 일반주택으로, 이 지역은 농가주택으로 지어졌지요. 바닥은 흙으로 된 것을 이전에 살던 사람이 시멘트를 바르고 조금씩 개선했다더라고요”

농가주택이 지어지면서 가게가 생겨났다. 가게는 처음부터 간판이 없었다. 귀내보트장이 있을 때만 해도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영주로 봐서는 귀내보트장이 유원지이다.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이며 가족나들이의 명소였다.

“보트장은 민 교장이 관리할 때는 물고기가 많았지요. 비온 후에는 물고기가 옆 논두렁으로 올라올 정도였어요. 이제는 세월이 흘러 많이 달려졌지요. 그때는 가게도 지금보다 조금 나았어요. 큰 마트가 없었으니까요”

지금 주민들이나 도로를 오가는 사람들이 담배나 술 등을 사러 온다.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간식거리를 사러 올 때도 있다. 그나마도 겨울에는 뜸하다.

가게 안에는 두 개의 문이 있다. 하나는 주방으로 연결됐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앞을 막았다. 원래 두 칸이던 방도 벽을 터서 방 겸 거실로 만들었다. 이곳이 편씨가 주로 생활하는 공간이다.

“이제는 나이 먹고 어디서 일을 할 수도 없고 이것이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요. 수입이 많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내 집이니까 하는 것이지. 이 나이에 일자리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고 하니 가게라도 해나가는 것이에요”

변두리에 있는 대부분의 가게는 나이든 사람들이 지키며 세월을 보내는 것일 거라는 그.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보다는 이런 가게라도 자리를 지켜야지 하는 마음이 있어 오래도록 운영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도 마을회관에서 정월대보름이라고 윷놀이 하는데 잠깐 갖다가 들어오는 길이에요. 지금 오후 2시가 지났네요. 아직까지 첫 손님도 못 받았어요. 이젠 새로운 도로로 많이 가니까 손님이 더 없지요. 옛날에는 버스도 많이 섰어요. 이 길로 아직 차도 다니고 버스도 다니지만 그냥 지나치는 날이 많지요”

▲작은 가게라도 지켜나가며
다른 곳과 달리 이 가게 안에 유독 번개탄이 많았다. 인근 주민들이 연탄보일러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가져다 놓은 것이란다. 한쪽에는 1.5L물병이 놓여 있다. 이것은 편씨가 먹는 물이다. 상수도가 들어오지만 사먹는 물이 더 싸고 편해서란다.

“마을에 아이들이 없어 과자는 잘 가져다 놓지 않아요. 반품도 거북하고요. 거리가 가까우니 전화하면 물건 차는 들어와요. 대부분 사람들이 시내 가서 살 것을 사고 급한 것이 있을 때 가게에 오죠.

솔직히 마트보다 100원, 200원이라도 비싼데 오겠어요. 우리 같은 소매업자들은 어려워요”

가게를 비울 수는 없어 그는 이날도 마을회관 정월대보름 윷놀이행사에 1시간 정도만 놀다 왔다. 오라는 데가 있어도 가게 땜에 나가질 못해 그만 접을까도 생각했단다. 매일 안에만 있기 때문에 건강을 위해 그는 매일 아침 꼭 운동을 한다. 식전에 1시간씩 동네 한 바퀴를 돌면 그래도 가뿐하다. 아직까지는 가끔 먹는 혈압 약 외에는 크게 아픈 곳이 없어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그다.

“이젠 팔면 팔리고 안 오면 어쩔 수 없고 크게 신경을 쓰려고 하지 않아요. 자녀가 6남매인데 도움받기보다는 이것이라도 하면서 사니 그래도 괜찮아요. 근데 아내가 식당을 하다 몸이 아파져서 병원에 있는데 큰 딸이 토요일에 오면 반찬을 해주고 가요. 내일이 토요일이지요”

인천에서 교사를 한다는 딸의 이야기에 편씨의 표정이 밝다. 바쁘게 살면서도 나름대로 키워놓으니 자녀들 모두가 그래도 다들 잘살고 있단다. 직장 잡을 때 잡고 결혼할 때 하고 안정되게 생활하는 것이 평범해도 부모들에게는 걱정거리를 덜게 하고 효도라고 그는 말했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만 봐도 좋단다.

“애들이 가끔씩 오면 용돈을 주는데 조금 더 주면 좋지요. 하하하. 근데 내가 살아보니 부모는 살아있을 때 잘해야 해요. 지난 시절 돌아보면 죽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더라고요. 울고불고 해야 소용없죠. 살아계실 때 잘해야지...”

모자가 멋스럽다고 하자, 둘째딸이 사준 것이란다. 어제는 아들이 점심을 먹자고 전화 와서 가흥택지에 있는 뷔페에서 골고루 먹었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장사보다 흥이 있어 영천에서 군대생활을 할 때도 노래자랑에서 1등을 했었는데 그래도 살면서 그 끼를 접게 되더라고요. 내가 대학을 7명을 보냈어요. 우리 애들 6명하고 내 동생까지 해서 7명이요. 지금은 다들 열심히 자기 밥벌이하며 잘 살고 있죠. 나도 가게 하는 날까지는 잘 지키며 해야죠”

인터뷰 끝에 2통에 사는 동갑내기 친구 김진옥(76)씨가 가게를 들어왔다. 집에 어설픈 박스, 신문지 등을 청소해서 팔았더니 2만2천600원을 받았다며 웃는다. 김씨가 “이거 담배 값 아닌가”라며 1만원을 편씨에게 건넨다. 담배 두 갑을 받아든 김씨는 “집에 아내가 청소한 것을 경운기에 실어 놨더라. 그래서 팔고 오는 길”이라고 웃으며 말하니 편씨도 “집에 있는 쇠파이프, 가스빈통, 불판 등 고물 많은 데 팔아야겠다”며 함께 마주보고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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