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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 확대경[140] 한국 독립운동의 산실, 임청각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8.03.06 13:05
  • 호수 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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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산실 임청각의 군자정

안동댐 진입로 왼편 언덕바지에 있는 임청각(臨淸閣·보물 제182호)이 요즘 방문객 러시를 이루고 있다. 대통령이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극찬하면서 부터이다.

이 집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의 집으로 영남산(映南山) 동쪽 기슭에 편안하게 앉은 배산임수 명당인데, 한일합방에 분노한 석주 선생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자 일제는 이곳의 정기를 끊고자 99칸짜리 임청각 마당 한가운데로 철길을 내면서 행랑채, 부속건물, 정문 등이 거의 절반이나 훼손된 반쪽짜리 집이다.

최근 국가보훈처, 문화재청, 행정안전부 장관 등 관계자들이 이곳을 잇달아 방문하는 것은 임청각 마당을 철도개설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해서이다. 임청각 경관 확보를 위해 철길을 돌리고, 안동댐 입구 도로를 지하화 하는 것까지 검토한단다.

임청각은 형조좌랑이었던 이명(李명)이 1519년(중종 14)에 건립한 건물로, 신라의 거찰 법흥사(法興寺) 구지(舊址)에다 99칸의 규모로 창건한 별당형 양반주택이다.

현존하는 살림집 중 가장 큰 규모이며, 올해로 꼭 500년을 채운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고성이씨의 대 종택이다. 세칭 99칸 기와집으로 알려진 이 집은 안채, 중채, 사랑채, 사당, 행랑채는 물론 정자와 정원까지 갖춘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민가의 규모가 워낙 방대하여 ‘도깨비가 세운 집’이라는 전설이 구전될 정도이다.

행랑채, 정문, 누대 등 36칸 이상이 철거되면서 현재는 50여 칸 정도만 남아있다. 철길 너머 도로 한가운데에 임청각의 정문이 있었다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임청각은 귀래정(歸來亭), 영호루(映湖褸)와 함께 고을 안의 명승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청각의 정자 서쪽 우물 앞에 있는 소위 ‘우물방’은 진음수가 방밑에서 솟아나 세 사람의 정승이 탄생한다는 이른바 영실(靈室)이다.

이 우물방은 이미 신혼부부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되어 있다. 임청각의 평면도는 일(日), 월(月)을 합친 ‘用’자형으로 되어 있다. 이 집은 정침과 외당인 정자와 사당, 연못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좌측에 정침이 있고, 우측에는 담장을 둘러 군자정이라는 정자가 위치하며, 정자는 툇마루를 달고 계자난간을 둘러 품격을 높였다.

정자 바로 옆에는 방형(方形)의 연못이 있으며, 연못 옆 언덕 위에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원래 불천위와 더불어 4대의 위패가 함께 봉안되어 있었으나 이상룡이 만주로 떠날 때 위패를 모두 묻어버려 현재는 봉안된 신위는 없다.

임청각의 주인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지금의 대통령)이었던 이상룡이 바로 이 집 영실에서 태어났다. 정승을 넘어 대통령이 태어난 것이다. 그는 안동의 명문가 출신으로 “가솔들을 왜놈의 종으로 만들 수 없다”며 의병에 가담하였으나 한계에 부딪치자 1907년 애국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런 노력에도 결국 나라를 잃게 되자 ‘나라를 되찾지 못하면 가문도 의미가 없다’며 사당의 신주와 조상 위패를 땅에 묻고 독립되기 전에는 절대 귀국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망명길에 올랐다.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1월의 일이다. 전 재산(현 시가 400억 추산)을 처분한 자금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기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투사를 길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아 독립운동계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 독립운동 자금이 부족하자 아들에게 ‘집을 팔아 자금을 마련해 오라’ 하여 아들 이준형이 “임청각을 팔겠다”고 하자, 문중에서 대신 독립운동 자금을 만들어 보내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상룡은 서로군정서, 통군부 수립, 임시정부 국무령 등 독립운동에 적극 헌신하였으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독립이 되기 전에는 내 시신을 고국에 가져가지 말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 1932년 75세를 일기로 황량한 만주벌에서 순국하였다.

임청각은 석주 이상룡을 비롯한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 동생 이상동, 이봉희, 조카 이형국, 이운영, 이광민, 당숙 이승화 이렇게 3대에 걸친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여 한국 독립운동을 선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자, 손녀는 해방 후 고아원 생활을 할 정도로 어려운 삶을 살았다고 한다.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석주 집안은 무려 삼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니 모두 9대에 걸쳐 망조가 들어야 하나? 석주의 유해는 광복된 지 45년 만에 겨우 중국 흑룡강성에서 봉환되어 현재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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