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윤환(문인화가)

기미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삼일절(三一節)은 올해도 추위 속에 찾아온다. 올해 제99주년 삼일절 영주지역 행사는 시 주관으로 관내 애국지사 합동 추모제를 시민회관에서 하고 기려자송상도지사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추모행사를 하면 끝이다. 해가 더하면 시민의식도 바뀌고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禮遇)가 좋아질 줄 알았는데 어제와 같은 오늘이다.

‘역사(歷史)를 망각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라는 준엄한 경구가 아니라도 주변현실에 한없이 부끄러운 삼일절을 맞이하고 있다. 민영환, 방정환, 나윤규, 전형필 등 이 분들도 일제에 항거한 독립유공자이다.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친숙한 위인(偉人)이지만 이 분들의 집이 현재 하나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집터 위에 표석만 있는 경우는 다행이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10만석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 치하에 자칫 해외로 반출될 수 있었던 문화재급 미술품과 고서적들을 수집하는데 전 재산을 탕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선생의 생가나 생전에 기거했던 가옥 등은 지금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고 있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주소다.

기려자송상도(騎驢子 宋相燾) 지사의 생가터 표지석이 며칠 전 세워졌다. 원래는 휴천1동 111-1번지이지만 현재 단층 슬라브집을 지어 살고 있고 옛 집터가 112-1번지까지 이어져있기 때문에 이곳에 땅주인 이차경(영주목욕탕) 여사가 흔쾌히 승낙해 줘 세우게 된 것이다.

표지석 앞면에는 ‘35년 길 위의 여정 역사(歷史)가 되다’, 윗부분에는 ‘기려자 송상도 생가터, 여기는 항일 애국지사 기려자 송상도(1871-1947) 선생이 태어나 돌아가실 때까지 기거했던 집터이고 선생이 목숨을 걸고 ‘기려수필’을 저술한 곳이며 또한 그것을 마룻바닥 밑에 묻는 등 관수(管守)하기 위해 심혈을 쏟은 곳이다.

여기 생가터에 서려있는 선생의 드높은 기개로 한말과 일제통치하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충신열사들의 행적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유서 깊은 이곳이 선생의 숭고한 우국충정의 정신을 기리고 서세(逝世) 70주년을 추모하여 후학들이 옷깃을 여미며 돌 하나를 세운다. 집터에서 왼쪽으로 30m쯤 되는 산기슭이 바라보이던 선생의 묘소는 1992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라고 적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자신의 삶과 행동을 기록한다는 점이다. 그 기록은 수 만년 전의 일들을 알 수 있다. 기록을 통해 과거를 알고 미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선비로서 의(義)를 숭배하던 마음으로 민족정기를 잇고 바로 찾겠다는 일념으로 일제치하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30여년 긴 세월을 끊어졌던 한민족의 역사(歷史)를 이어주신 큰 뜻을 선양하고 계승하기 위해 기념사업회에서는 2015년부터 ‘기려수필’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해 노력했지만 지난해 심사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일본의 방해공작과 감시를 피하기 위해 제목을 ‘수필(隨筆)’이라고 했다. 수필은 역사보다는 에세이를 연상하게 한다. 비슷한 시기에 쓴 황현 선생의 매천야록(梅泉野錄), 조희제 선생의 염재야록을 함께 유네스코에 등재해 한민족의 생존권이 일제치하에 부당하게 침해받은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 우리 영주가 선비의 고장이라는 사실을 알리는데도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광양시에서는 매천로라는 긴 사차선 도로 옆에 매천 황현 생가를 복원해놓고 선생이 잡수시던 우물 물을 누구나 퍼마실 수 있도록 해놓았다. 매년 매천문화제, 매천 학술대회, 황현 문학상 등이 열린다. 우리 영주도 앞으로 광복기념관을 중심으로 송상도 생가 복원과 찾아오는 외지손님에게 볼거리를 만들어야 하며 시민들의 나라사랑 현장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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