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화 씨

세월의 흔적 담아내며 그대로 보존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이자 방앗간

부석사를 가는 방향으로 폐교된 상석초등학교 옆 도로를 지나 100m 정도를 가면 나지막한 지붕에 오래된 간판을 걸고 작은 미닫이문이 있는 ‘상석수퍼’와 ‘상석 떡 방앗간’이 보인다. 차로 쌩쌩 달리다 보면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그래도 이 도로를 자주 오가는 사람들은 도로 한쪽에 차를 세우고 음료수와 과자를 사간다. 가끔 부모님 묘소를 찾아뵐 때도 이곳을 찾아와 술 한 병과 간단한 안주를 사며 마을주민들과 안부인사도 나눈다.

지난달 26일 오후 길을 가던 손님이 차를 세우고 들어왔다. 막걸리 한 병을 들고 안주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한쪽에 쌓아둔 과자를 집자, 가게주인인 김태화(59)씨가 “그것은 가져가지 마세요. 죄송해요. 반품하는 과자에요”라고 말한다.

가게 안에는 꽤 다양한 물건들이 진열돼 있다. 반품된 과자를 놓았던 자리인지 유독 한쪽 선반이 비어있다.

“원래 여기 선반에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설 대목 밑에 물건차가 다시 들어오지 않아 채워놓지를 못해 물건들을 팔지 못하고 있네요. 시골이라 잘 들어오지 못하니 아무래도 어렵죠. 그전에 팔리지 않아 날짜 지난 것은 한쪽에 놔뒀는데 이번엔 좀 많네요”

▲시골이 좋았지만 현실은...

옛 상석초등학교 뒤편에는 현재 상석보건진료소 자리에 가게가 있다 없어졌다. 또 다른 가게였던 ‘상석수퍼’는 20여 년 전 김씨가 인수했다. 마을어르신들은 이 가게가 100년 넘었다고 했다.

상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란 김씨는 23살인 1982년 결혼해 2남 1녀를 낳았다. 시어른을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2남1녀를 키우며 살다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움도 많았다.

“동네어르신이 운영하던 가게를 내놓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당시 촌에서 없는 살림에 몇 천만 원이 있겠어요. 그래도 시어른 모시고 아이들 교육도 시켜야하니 빚을 내서 가게를 얻었죠. 젊은 나이였지만 가게운영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고생을 많이 했어요. 힘이 들어 마르고 얼굴도 형편없었죠” 김씨는 어릴 적부터 시골을 좋아했다. 어쩌다 시골에 가면 밭에서 자라는 상추, 고추, 가지 등을 보는 것이 좋았다. 어른이 되면 촌으로 갈 거야 했던 말이 씨가 됐는지 시골로 들어왔다. 그러나 현실은 고생스러웠다.

“시골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고 왔지요. 이래 저래 힘든 시간이 줄어들어 2~3년 전부터 조금 편안해져서 살도 찌고 얼굴도 좋아졌어요”

사람들과 어울리며 베풀고 사는 것을 좋아하는 김씨는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주변 일을 돕고 음식을 해서 나눠먹는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게 상처를 받을 때도 있단다. 하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 서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좋아 다시 베풀게 된단다.

“맛이 있든 없든 이웃들과 나누며 사는 것이 좋아요. 이젠 몸이 따라 주지 않는 것이 안타깝죠. 가게도 반품이 늘었어요. 덜 팔리니 어쩔 수가 없죠. 만약 세를 준다 한다 해도 못할 거에요. 내 집이니 볼일 있으면 문 닫고 벌이가 되면 되는가 보다하는 것이지요. 한창 장사가 잘 될 때는 돈을 벌어야 하니 가게에만 있었어요. 다 옛날일이에요” 시골에서 지금까지 가게를 운영하지만 워낙 장사가 덜 되니 지금이라도 그만 할까 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다. 그래도 동네사람들도 서로 돕고 생각해주는 마음이 있고 마을 일에 남편과 함께 조금이라도 도우며 살아간다.

▲가게 속 별별 이야기들

가게를 들어서면 ‘띵동’ 소리가 난다. 김씨는 이 소리가 나기까지는 사연이 있다며 나무로 만들어진 돈통을 가리켰다. 가게를 인수받을 때 함께 받은 것인데 상당히 오래된 모양새다. 팔라는 사람들도 많은데 팔지 않았단다.

30대 후반에 아무것도 모르고 바쁘게만 살던 시절, 가게와 방이 연결된 문 앞에 이 돈통을 놓고 옆에는 담배를 진열해 놓았단다.

어느 날, 남편은 밭에 갔다 와서 씻고 있었고 김씨는 점심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게 안에서 조그맣게 소리가 났다. 손님이 온 모양이다 싶어 나와 보니 하얀색 승용차가 시동을 걸고 빠르게 부석사방향으로 갔다. 문 밖을 나와 뭔 차를 저리 몰고 가나 생각만 했단다.

잠시 뒤 가게를 찾은 손님에게 물건을 팔고 만원을 잔돈으로 바꾸기 위해 돈통을 열고 놀랐다. 빈 통이었다. 그날 만원자리 십여만 원을 잔돈으로 바꿔놓았는데 십원들만 제외하고 모두 가져간 것. 이후에도 담배를 보루 채 잃어버리고 돈을 몇 번 잃게 되면서 모두 방안에 놓아두게 됐단다. 또 한 번은 방앗간에서 일을 하다 느낌이 이상해 집안으로 가게를 가지 않고 밖으로 돌아 가게를 들여다봤다. 어떤 키 큰 남자가 누런 자루를 들고 신발을 신고 몸의 반이 방에 들어가 있었다. 소름이 돋고 말이 나오지 않았단다. 담배를 쓸어 담으려고 했던 남자는 김씨가 온지 모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때만 해도 담배가 한 보루에 2만5천 원 할 때이다. 한 박스면 금액도 크다. 그래서 가게 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담배 사러 오셨어요? 무슨 담배 드릴까요?”라고 물었단다. 심장은 빠르게 뒤었지만 이때는 10년 넘게 가게를 운영해 온 때라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뒤에서 말이 들리자 놀란 남자가 아무런 말도 없이 자루를 둘둘 말더니 똑바로 쳐다보며 움직여 문을 나왔어요. 그래서 뒤로 주춤거리며 가게 건너편 전봇대에 서서 있었죠. 그러자 뭐라고 궁시렁 대며 화를 내면서 가더라고요. 벌벌벌 떨렸어요” 이외에도 상습적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리며 협박을 한 사람을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었다고.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았어요. 가게가 잘될 때는 돈을 벌어 쓸 시간이 없을 정도였죠. 초창기에는 아무것도 몰라 모든 물건을 들어온 원가대로 팔았어요. 지금 생각해도 참 몰랐죠. 돈이 남는지 부족한지 몰라 한번 적어보니 밑지지는 않고 그래도 잘 팔았더라고요. 나중에는 물건에 대한 표를 만들어 나만 볼 수 있게 붙여 놨죠. 그 전까지는 참으로 힘들었요”

▲쫄깃한 떡과 고춧가루 예약이요

가게 옆에는 상석 떡 방앗간이 있다. 입구의 작은 문과 달리 내부는 넓다. 이날은 가게 문을 조금 열어 놓았지만 명절 전 한창 한파가 심할 때 바람도 많이 불어 문을 열어 놓지 못했단다. 멀리 가지 않아도 가까이에서 떡을 해 먹을 수 있다는 좋은 점이 사람들을 찾게 한다. 떡값도 종류에 따라4천원부터 7천원까지 받는다. 고춧가루도 빻아준다.

“전에 기지떡도 하고 다앙하게 했는데 이젠 쌀을 가져오면 시루떡과 인절미를 해줘요. 인절미는 고물을 미리 해놓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떡을 하기 전에 고물을 가져다주면 당일에는 고물을 만들어 놓고 묻혀줘요. 재료를 다 갖춰놓은 상태가 아니라 다른 곳하고 달라요. 가져오면 다 해주기는 해요. 미리 예약하면 더 좋고요”

팥으로 기피를 만든 인절미는 맛이 좋지만 여름에는 쉬기 때문에 못하고 쌀가루를 쪄서 주면 집에서 만들어 먹기도 한다. 떡을 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아직까지는 할 수 있는 날까지는 하고 싶다는 김씨는 나란히 세워진 옛날 기계를 손으로 훑었다.

‘띵똥’소리에 가게로 다시 가자 막걸리를 찾아 손에 든 손님이 “내가 이것 살라고 부석까지 갔다 왔어요”라고 말하자 김씨가 “아이고 고마워요”라고 답했다.

오전에 물건을 샀지만 카드기계가 없어 그냥 갔던 손님은 부석에서 돈을 찾아 오후에 다시 가게를 들린 것이다.

손님이 서있던 자리를 내려다보니 가게 안에 중간 문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나무선반도 그대로 있어 물건이 올려 있다. 여닫던 미닫이문은 한쪽 문만 남아 있고 미닫이틀은 사람들의 오가는 발걸음에 스쳐 많이 닳았다.

“가게 천장에는 대들보가 그대로 있어요. 그래서 더 보기가 좋고 운치가 있었죠. 그런데 비가 세면서 나무판을 덮었어요. 처음에는 이 나무 미닫이문까지가 가게래요. 평상을 가게 앞에 놓고 살던 전 주인이 벽을 만들어 넓히고 문을 달았던 것 같아요”

김씨는 볼 것 없는 구멍가게이지만 그래도 운영하는 날까지 그냥 그대로 살고 싶단다. 가게에 있다 보면 어느 날은 “아직도 가게가 있네요”라며 반갑게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