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래(1925~1980)

설야(雪夜)

박용래(1925~1980)

눈보라가 휘돌아 간 밤
얼룩진 벽에
한참이나
맷돌 가는 소리
고산식물처럼
늙으신 어머니가 돌리시던
오리오리
맷돌 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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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는 눈물의 시인답지 않게 간결하고 정갈하면서도 토착적 정서는 시릴 정도로 선명하다. 그의 詩 <설야>를 대하노라면 어릴 적, 설을 앞두고 눈 오는 밤 토방으로 마당으로 창고로 바삐 오가시며 설 명절 음식을 만들어 나르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삼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어머니는 오랜 시간 삶에 의욕을 잃으셨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의 식사는 물론 양말 하나까지 챙겨드리며 살아오셨다. 그리고 이발까지도 어머니가 직접 해드렸으니 어머니의 삶은 아버지에 맞추어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도 슬픔이었지만 그동안의 간호로 인해 극도로 노쇠 해지신 어머니가 모든 의욕을 잃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고 밖에 출입을 아예 하지 않으셔서 걱정이었다. 고향의 동생들은 요일별로 어머니를 챙겼고 멀리 살고 있는 나는 한동안 날마다 두 세 번씩 전화를 드리는 일로 안타까움을 대신했다.

지금은 많이 좋아지셨지만 오늘처럼 한파가 몰아치는 긴 겨울밤이면 혼자 지내시는 고향의 어머니 생각에 가슴부터 먹먹해진다. 건강하고 오래오래 행복하시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고산식물처럼 늙으신 어머니가 돌리시던 오리오리 맷돌 가는 소리 들리고 저 밖으로 나가면 함박눈이 끝도 없이 흩날리는 내 유년의 설 명절 전날 밤이 그대로 보일 것만 같다.

김이삼
영주시낭송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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