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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산골, 능금 마을 하촌1리(花村)우리마을탐방[185]봉현면 하촌1리 하촌·한티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8.02.05 17:24
  • 호수 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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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화촌(花村)에서 유래한 ‘꽃피는 산골’
해발 300-400m 천혜 자연조건 ‘능금마을’

하촌1리 마을 전경

봉현면 하촌1리 가는 길
풍기 IC 사거리에서 예천방향 히티재를 넘는다. 유전리 꽃피는 광장-노좌1리-노좌보건소 앞을 지나 200m쯤 가다보면 ‘능금의 고장 하촌1리’ 표석이 나타난다. 우측으로 난 노좌1교를 건너 과수원길 600m 가량 들어가면 하촌마을 동구(洞口)를 알리는 표석이 보인다. 표석방향 오르막길을 오르니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마을이 갑자기 나타난다. 지난달 하촌 마을에 갔다. 이날 마을회관에서 이상창 이장, 윤차현 노인회장, 이성희 전 노인회장, 서규원 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역사 속의 하촌 마을
봉현면 지역은 역사적으로 풍기에 속해 있었다. 삼국시대 때는 신라의 기목진(基木鎭)이었고, 고려 때는 기주(基州), 조선 태종13년(1413) 기천현(基川縣), 1450년 풍기군(豊基郡)으로 승격됐다. 조선 중기(1700년경) 무렵 군(郡)의 행정구역을 면리(面里)로 정비할 때 풍기군 노좌리면(魯佐里面) 하촌리(下村里)에 편성됐다. 당시 노좌리면에는 유음리(柳陰里), 이전리(泥田里), 대촌리(大村里), 하촌리가 있었는데 대촌리가 현 노좌리이다. 조선 후기 1896년(고종33)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풍기군 노좌리면이 노좌면으로 개칭되고, 노좌 2,3리 지역에 백산동(白山洞)과 월동(月洞)이 새로 생겼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풍기군, 순흥군, 영천군이 영주군으로 통합되고, 노좌면과 와룡동면(臥龍洞面)을 합쳐 새로운 봉현면을 탄생시켰다.
하촌에는 300년전 김녕김씨·안동김씨가 살았고, 200년전부터 강릉유씨·경주이씨가 살고 있다.

옛 우물터

지명유래
하촌은 자구산(758m)의 남쪽, 한티(598m)의 동쪽 산기슭 양지바른 둔덕 품에 자리 잡았다. 또 천부산(850m)에서 발원한 석관천이 마을 앞을 흘러 하촌 들녘은 해마다 풍년이다.

이성희(77) 전 노인회장은 “옛날 이 마을 앞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해마다 연꽃이 만발하여 ‘꽃마을’이라 불렀다. 그 후 이 마을 선비들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면서 꽃 화(花)자에 마을 촌(村)자를 써 화촌(花村)이라고 이름 지었다”며 “그런데 나중에 행정구역을 정비할 때(조선중기) 당시 노좌면소재지(대촌리) 아래쪽에 있다하여 아래 하(下)자 하촌리(下村里)가 됐다”고 말했다. 이 마을 유영하(78) 씨는 “하촌리 지역 마을표석에 보면 모두 ‘꽃피는 산골’이라고 새긴 것은 옛 지명 화촌(花村)에서 유래한 것 같다”고 말했다. 마을 뒷산 넘어에 한티마을이 있다.

한티 고개마루(해발 598m)

하촌에서 3km 가량 오르막길을 올라 예천군 하리면 탑리로 넘어가는 한티(고개마루)에 있는 마을이다. 한티의 ‘한’은 ‘큰’이라는 뜻이고, ‘티’는 재(고개)라는 뜻이다. 즉 한티는 큰 고개라는 뜻을 가진 순수한 우리말이다. 해발 598m에 위치한 한티는 죽령(689m) 다음으로 높은 재다. 재가 높아 재에 오르면 땀이 많이 난다하여 한현(汗峴), 바람이 차다는 뜻으로 찰 한(寒)자 寒티, 300년 전 한(漢)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하여 漢티 등 여러 유래가 전해진다. 봉현’이란 지명은 IC에서 히티재로 오르다보면 한천마을 앞에 있는 봉정지(鳳停地)의 봉(鳳)자와 여현(礪峴,히티재의 옛이름)의 현(峴)자를 조합하여 봉현면(鳳峴面)이라 했다.

이상헌의 독립운동 비사

이상현의 독립운동 비사
‘이 마을의 보물은 무엇일까?’ 찾던 중 이석희 씨의 제보로 일제 초 비밀리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상현(李相鉉,경주인,39세손,1905-1927)의 ‘작문청서장(1922-1925작성)’을 발견했다.

이석희(70) 씨는 “이상현은 저의 백부로 당시 예천 대창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 온 수재(秀才)로 상해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여 진다”면서 “함께 유학했던 예천의 친구 권 모야는 일본헌병대에 끌려가 숱한 고문을 받았고, 백부는 하촌 자택에 감금된 채 일본 순사의 감시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종조부님께 들었다”고 말했다.

이상현은 예천 용궁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후 봉현 하촌에서 가택연금 생활을 하다 화병으로 1927년 병사했다. 그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와 연락을 주고받았고, 여러 차례 상해로 가려고 했으나 삼촌의 만류와 일본경찰의 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작문에는 조선 청년의 할 일, 민족의 장래희망, 일본의 비인도적 야만행동, 선포문, 결의문, 독립군의 병력, 무기, 활동 등이 담겨 있다. 더 자세한 문서가 여러 권 있었으나 소실됐다고 한다.

소년 임길상이 겪은 6.25
임길상(82) 어르신이 목격한 6.25는 다음과 같다. 「1951년 1.4후퇴 무렵 북으로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 3천여 명이 노좌리로 집결했다. 패잔병들이 무릎재(안정 여륵)를 넘어 학가산 방향으로 이동을 시작한 후 미군기가 마을(노좌리·하촌리)을 폭격하고, 미군이 마을에 불을 질렀다」는 내용이다.

임길상 어르신은 “그 때 내 나이 11살이었다”며 “당시 미군은 마을에 패잔병들이 숨어있는 줄 알고 (잘못된 정보로) 마을을 폭격한 것으로 안다. 미군이 짚단에 불을 붙여 지붕 위로 던지고, 서숙가리에 불을 지르는 것을 목격했다. 또 포탄이 마을에 떨어졌으나 마침 불발탄이 되어 폭격 피해는 없었다”고 말했다.

한상욱(78) 어르신은 “우리 마을 집들은 모두 6.25 후 지은 집들”이라며 “6.25 때 모두 불타고 새로 지은 집이 새마을주택으로 개량됐다가 90년대 이후 현재 모습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아이 업고, 소죽 이고
베이비붐 세대 어머니들의 고단한 삶 이야기가 하촌에도 있다. 이 마을 황순애(80) 할머니는 한티에 살다가 19살 때(1958년) 하촌 경주이씨 가문의 며느리가 됐다.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1960년대. 남편은 산꼭대기 다락논에 논 갈로 가고, 아내는 소죽 쑤고 점심밥 지어 다락논에 갈 준비를 한다. 양은 다라이에 소죽을 담고, 그 위에 점심밥과 주전자를 얹었다. 아이를 업고 소죽 다라이를 겨우 머리위에 올렸다. 무겁다. 산길을 따라 해발 400m가 넘는 다락논으로 올라야 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황순애 할머니는 “숨이 차고 목이 빠지는 것 같아 좀 쉬고 싶어도 내렸다가는 다시 머리에 일수가 없어 그냥 참고 올라야만 했다”면서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살면서도 6남매를 잘 키우고 공부시켜 시집장가 잘 보냈다”고 말했다.

새마을 창고
사과 저장고와 작업장

능금의 마을 하촌
마을 입구에 큰 창고가 보인다. ‘사과저장고’라고 한다. 그 옆에는 작업창고도 있다.

이상창(65) 이장은 “하촌1리는 ‘꽃피는 산골’의 중심마을로 하촌에 26가구 한티에 12가구가 살고 있다”면서 “해발 300-400m 산지에 위치하고 있어 사과 경작지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췄다. 하촌지역은 산지를 개척하여 밭작물 중심 농업에서 담배-인삼-사과로 변천해 왔다. 지금은 100% 사과농사를 짓고 있는 우리 마을은 모두 사과전문가들”이라고 말했다.

이영희(60) 부녀회장은 “예전에는 가을에 출하하면 끝났는데 지금은 저장해 두었다가 제 때 분류 포장하여 공판장으로 낸다”면서 “지금 설을 앞두고 작업이 한창이다. 보다 나은 값을 받기 위해 수원공판장으로 간다”고 말했다.

하촌1리 동구
하촌1리 사람들

하촌1리 사람들
한티산(뒷산) 9부 능선까지 과수원이다. 예전에는 산꼭대기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 다락논이 많았다고 한다. 서규원(85) 할머니는 “예전에 물이 귀했다. 마을 윗쪽에 고드매기 샘이 있고, 중간이 큰샘, 마을 앞에 정자샘이 있었다”며 “버지기로 물 여다 먹기 참으로 힘들었고, 도랑이나 웅덩이에 가서 빨래하기도 힘들었다. 늘그막에 좋은 세상만나니 고생만하다 일찍 세상 떠난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옛 일 생각하면 지금은 신선놀음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남화일(80) 할머니는 “예전부터 하촌1리는 참나무 장작에 이밥 해 먹는 살기 좋은 마을로 등 뜨시고 배부른 마을이라고도 했다”며 “2000년부터 사과 소득이 치솟아 부자는 아니지만 윤택한 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윤차현(75) 노인회장은 “하촌은 예로부터 물이 귀한 마을이었다”며 “산중턱 계곡물을 끌어와 30여 년간 간이상수도를 사용하다가 2010년 마을의 숙원사업인 (지하수를 퍼 올린) 상수도 시설을 완공하게 됐다”고 말했다. 윤 회장은 또 “마을의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상창 이장을 비롯한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 등 노고가 많다”며 “정월에 윷놀이, 5월에 어버이날 행사, 가을에 효도여행 등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오후 4시경 회관에서 나와 윤차현·이성희 두 회장과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이 전 회장은 “우리 마을은 좌청룡 우백호가 마을을 감싸 안아 천하 명당”이라며 흐뭇해했다. 상수도 시설과 옛 샘터 3곳에도 가봤다. 옛 새마을창고를 보고 동구지(洞口址) 앞에 섰다. 윤 회장은 “여기가 마을 동구였다. 老노가주나무가 있었고, 동신을 모시는 성황단이 있었다. 어른들에겐 쉼터였고, 아이들에겐 놀이터였다”면서 “땅 주인이 바뀌면서 밀어버려 아쉽다”고 말했다.

이상창 이장
윤차현 노인회장
이영희 부녀회장
이성희 전 노인회장
임길상 어르신
서규원 할머니
남화일 할머니
황순애 할머니
유영하 씨
한상욱 씨

이원식 시민기자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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